#1
나는 책을 사지 않는다는 거짓말이고 일 년에 두어 권의 책을 산다. 내것은 아니고 아이의 책이다. 특별한 날이나 보상으로 선물해 주는 것이 다이니 뭐 거의 안 산다고 해도 되겠다.
이런 나에게도 책을 많이 사던 시절이 있었다.
책이 없던 아이였다. 책육아가 없던 때라 그랬나, 나의 엄마가 무지해서 그랬나, 우리 집엔 그 흔한 동화책 한 권이 없었다. 까막눈이던 어느 날, 갑자기 동화책 두 질이 생겼다. 삼촌이 전래동화 한 질과 창작동화 한 질을 나와 내 동생에게 선물해 준 기억이 생생히 난다. 쩍쩍 소리가 나던 동화책이 얼마나 좋았던지 까막눈인 나는 동화책을 받자마자 한 질을 후루룩 다 읽어냈다. 그리고 나쁜 캐릭터가 나오는 장은 여지없이 찢어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놀부가 나오면 놀부 있는 곳까지, 책 모서리에서 놀부얼굴까지를 찢어놓았다. 30권의 동화책은 금방 너덜너덜해졌다.
까막눈이 벗겨지고도 한참 동안 책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오후, 딱 이 한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곳은 어느 서점, 엄마가 왜 그곳에 날 데려갔는지는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 평생 한 권의 책을 본 적 없는 엄마인데 그때 우린 왜 서점에 있었을까. 엄마가 뭐라고 주인과 대화하는 사이 4학년이던 나는 책장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운명과 같이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왜 그 책을 골랐는지는 모르겠다. 그 책이 내 앞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 책을 골랐다고 밖에 말을 못 하겠다.
"엄마, 나 이 책 사줘"
내 인생 최초의 요구였다.
안네의 일기.
소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던 보라색 표지의 책이었다.
전쟁 중의 이야기라는 것도 모르는 채, 그저 어느 한 소녀의 이야기로만 만났던 안네의 일기.
안네의 일기는 금세 내 친구가 되었다. 안네가 일기장에게 부르던 이름은 키티였다,
'키티야 안녕?'으로 시작하던 첫 문장이 마음에 들어, 그날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쓰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냥 썼다.
나의 일기장 이름은 키디였다. 안네에게 키티가 있었다면, 나에겐 키디가 있었다.
'키디야 안녕?'으로 시작하던, 보물과도 같은 시간이 고스란히 살아있던 내 일기장 키디였다.
이 일기를 무려 고 3 때까지 썼다. 나이가 드니 조금은 유치하게도 느껴졌지만, 나의 일기장은 여전히 키디였다. '키디야 안녕?'하고 인사를 하면 어느새 속마음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하던 짝사랑이나 선생님들에 대한 원망, 친구사이의 시기, 질투... 다시 읽어보기가 차마 부끄러워 책장 한편에 꼭꼭 숨겨 두었다.
키디와 함께 내 책장엔 책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책을 사주지 않았기에, 나는 스스로 책을 사기 시작했다. 중학교 3년 내내 매주 서점엘 갔다. '딸랑' 소리를 내고 들어선 서점의 고요함과 문학대전집코너는 마치 호그와트에라도 와 있는 듯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몇 백 권의 책이 눈앞에 있었다. 읽지도 않았는데 제목만 보아도 다 읽은 듯 배가 불렀다. 죄와 벌, 좁은 문, 아들과 연인, 양철북.... 한 시간을 그 앞에서 끙끙대며 딱 한 권의 책을 사가지고 나왔다. 읽고 또 읽고 책장에 꽂았다. 학생이 무슨 돈으로 그 많은 걸 샀는지, 3년 동안 매주 1권의 책을 사댔으니 어느새 책장은 나의 작은 서점이 되어있었다.
주말에 깨어나면 절대 이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누워서 빈둥대며 책을 읽는 그 시간이 너무나 달콤했기 때문에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불 안에서는 주로 책을 읽으며 상상을 하곤 했다. 어느 날은 빨간 머리 앤이 되어 이불속에서 돌아다녔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난 그 순간 빨간 머리 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혹은 검은 머리 이숙현이던가.
나이가 들어서도 언제나 한쪽벽을 지켜주던 일기장과 손때 묻었던 나의 책들. 그러나 지금은 이 소중한 것들이 없다.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억울하고 분한데, 잠시 집을 뛰쳐나왔던 그때, 내 엄마가 내 보물들을 다 갖다 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네 책장에 있는 책, 다 갖다 버린다!"
"응"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내 일기장 키디도, 3년간 모아 왔던 내 책도, 다시 돌아간 내 방엔 그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난 그렇게 다시 책 없는 아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