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사지 않는다

#2

by 이다

한 권 한 권, 수집하듯 모아 온 책과 6년을 써온 일기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책으로 꽉 차 있던 나의 책장은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권의 책이 남아있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죽을 만큼 슬픈 건 아니었다.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키디에게 해왔던 이야기들이 어디 인지도 모를 쓰레기더미널브러져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쓰레기 더미 위에 있는 일기장을 누가 들춰보진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되었다.



그 뒤로 가끔가다 몇 권의 책을 사긴 했지만, 더 이상의 마법 같은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귓가에 윙윙하고 울리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캐캐묵은 살림살이가 책이 있던 자리를 대신했고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사지 않았다. 뭐 책이 없다고 못 사는 건 아니었다.






어렴풋이 책이라는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 건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다. 내 책을 남김없이 버렸던 엄마는 내 아이의 책은 엄마인 나보다도 서둘러 마련해 주었다. 말랑말랑 감촉이 좋았던 아기책 전집이었다. 엄마는 아기랑 같이 태어나는 걸까. 다 커버린 나는 아이의 책을 보기 시작했고 아이와 같이 책을 읽었다. 그렇게 조금씩 책이 생겼다. 아이의 책이 한 권 한 권 늘어날수록, 그 옛날 서점에서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골라오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책을 모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책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중학생인 내가 보였다. 책만 보면 가슴 쿵쿵 뛰며 책을 모았던 아이,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아이를 서점에 데려갔다. 예전보다는 활발한 분위기였지만 으레 서점만의 고요함이 있었다. 생전처음 아이들의 코너로 발길을 옮겼다. 처음 보는 아이들의 책, 어떤 책이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에게 고르라고 하니 두 권을 골라왔다. '아파트에 귀신이'라는 만화책과 '신비아파트 유령이야기' 책이었다. 아무 말없이 취향을 존중하며 두 권을 골라 나왔다.



그 뒤로 몇 번 서점에 더 갔지만 아이의 취향은 여전히 귀신이었다. 세상에 이런 취향이 있나. 그 뒤로 아이의 취향존중은 멈추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린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책들이 많았다. 아이들의 책을 잘 모르니 제목을 적어가며 하나하나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파트 분리수거의 틈에서 책을 보게 되었다. 책에 눈이 돌아가 있던 나는 그 무거운 전집 더미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그 많은 책을 낑낑대며 집으로 옮겨왔다. 가지고 와보니 거의 읽지 않은 새 책이었다. 깨끗이 닦아 책장에 꽂아두니 사라진 나의 책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기뻤다. 그랬다. 나는 쓰레기 더미 위의 내 책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을 했다. 그 뒤로 분리수거날만을 기다렸다. 좋은 책이 나오지 않았나 분리수거장을 어슬렁 거리는 엄마하이에나가 된 것이다. 그곳에선 꽤 많은 책을 건질 수 있었다. 책의 상태도 좋았고 더군다나 열심히 적어두었던 책들도 있었다.


'이 집 아이들은 읽지도 않았네. 내가 다 읽어주겠어.' 이런 마음이었다.


책은 책장을 불렀다. 하나, 둘 책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둘 곳이 없었다. 어느새 집안 군데군데 책장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새 아이는 크고 있었고 책장도 크고 있었다. 간간이 중고전집을 사기도 하고 다 읽은 책은 당근으로 팔기도 하면서 책을 조절해 나갔지만 어느새, 책장이 모자랐다.






이게 아니었는데, 읽지도 않은 책들이 집에 쌓이기 시작했다. 늘어가는 건 덩치 큰 책장뿐이었다. 난 단지 내 책을 돌려받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일이 커져있었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물건에 공간을 점령당한 내가 있었다.



아이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욕심이었다. 아니면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책 한 권 없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 말이다. 그것도 아니면, 다 사라진 나의 책들에 대한 보상이거나.

그러나 아이 책에 대한 고민은 쉽게 결론이 나질 않았다. 이건 추억도 아닌데 비우지 못하고 있는 나였다. 조용히 나에게 물어보았다.



'가슴이 뛰니? 설레니?'

'아니. 답답해. 내가 뭐 하고 있나 싶어. 사실은 다 없애버리고 싶기도 해.'



그랬다. 책무더기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만족에 취해 있었다. 재빨리 책 먼지를 걷어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매일 도서관에 갑니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다 읽자, 평소 가보지 않았던 생소한 곳, 도서관이라는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갑자기 하루라도 빨리 도서관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천방지축 아이를 데리고 드디어 도서관이라는 곳에 첫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