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줍은 도인

유미를 소개합니다

by 나탈리



점심 식사 후 퇴근하는 유미(가명)는 사회적 일자리사업 차 파견된 직원으로, 한 달에 56시간만 근무를 한다. 다운 증후군이 있어 말소리는 다소 어눌하지만, 제 임무를 다하기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기특한 아가씨다.

뭐라 말을 건네면 수줍은 미소와 함께 단답형으로 답할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은 드물다.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해대는 통에, 수시로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게 만들던 어느 사회적 기업의 장애인 직원과는

많이 다르다.

유미는 나보다 한 10일 정도 늦게 파견되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며칠은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승용차로 유미의 출퇴근을 책임지더니, 또 얼마 동안은 코디 선생님이 유미와 동행하며 버스로 출퇴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오갈 때마다 코디 선생님은 유미를 잘 부탁한다며 지나칠 정도의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하곤

했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함으로써 유미가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받는 것! 그것은 코디 선생님이나

기관의 큰 보람일 것이므로, 지나친 공손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그럭저럭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유미는 혼자 출퇴근할 수 있었다.


KakaoTalk_20241218_222132965_02.jpg


둘이서 스케줄 근무를 하다 보니 부득이하게 혼자 일하는 날이 많은 이곳. 비슷한 양의 일을 둘이 하다 혼자 해내려 하면 엉덩이 붙일 새도 없는데, 유미가 있어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유미가 정리해 놓은 세탁물들을

확인하고 손을 보는 절차는 부득이하지만, 숨 쉴 겨를을 만들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좀 까다로운 우주복이나 매트리스 커버 같은 것은 될 수 있으면 직접 하고 유미에게는 비교적 쉬운 빨래만 던져 준다. 하얗고 널따란 시트는 유미와 2인 1조로 접으면 한결 수월하여 둘만 있을 때는 주로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 시트의 양끝을 잡고 손끝에 힘을 주어 올을 바로 잡고, 모서리를 겹쳐 잡고 하는 것은, 이제 유미에게 일도 아니다.


배꼽인사를 하며 유미가 출근을 하면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차를 한 잔 타 준다. 시원한 음료를 좋아하는

유미이지만 요즘 같은 추위에는 누가 뭐래도 따뜻한 게 최고니까. 뜨거우니 천천히, 호호 불며 마시라는

당부와 함께 찻잔을 놓아주고, 발열체크를 하고, 근무 일지를 기록하게 하고는 확인란에 사인을 한다. 세탁물이 건조되어 나올 때까지 유미는 핸드폰에 열중한다. 정리할 게 없을 때면 멍하니 있기도 뭐 하니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오락이다. 게임도 잘하고 가끔 친구한테 전화도 걸고 음악도 듣는 유미는 신세대 젊은이답다.


한 번은 유미가 식당에서 반찬이 담긴 커다란 접시를 놓쳐버렸다. 접시를 한 손에 든 채 밥을 덜다가 손에서

미끄러졌나 보다. 어쩔 줄 모르고 보고만 있는 유미, 엉망이 된 바닥, 그리고 유미와 내게 쏠리는 시선들!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춰버린 것 같았다. ‘수습을 해라, 수습을!’ 정신을 차리고 엎드려, 얼크러진 음식들을

대충 접시에 주워 담고, 휴지와 물티슈를 얻어다 바닥을 닦았다. 그런 다음 유미에게 다른 접시로 음식을

담아라 일러 주고 국을 퍼서 갖다 주었다. 유미에게는 배식대가 너무 높은 것 같아 국만큼은 언제나 대신

떠 주곤 했었다.

“미안한 기색도 없던데요?”

후에 그 사태를 지켜본 이가 던진 말이다.

“미안해도 표현을 못하겠지요.”


KakaoTalk_20241218_222514299.jpg 쳇 GPT에게 요청한 그림


유미는 이해와 약간의 배려가 필요한, 딸아이뻘 되는 존재, 그리고 배려는 꼭 유미에게만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나는 그리 생각하고 주욱 유미를 대했는데, 그런 생각을 바꿔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의

순간을 겪기도 했다. 유미가 지각을 한 것이다. 근태는 직장생활에서 기본인데,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지각을! 그것도 꼭 선임 없이 혼자 근무할 때에만. 처음 지각했을 때는 그냥 넘어갔다. 두 번째는 선임에게

얘기를 했다. 선임은 펄쩍 뛰며 또다시 그런 일 있으면 사무실에 얘기를 하라고 명령하다시피 얘기를 했다.

“이뻐하는 건 이뻐하는 거고(그다지 이뻐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근태만큼은 확실히 해 두어야지. 장애인이라고 불쌍히 여기면 안 돼요. 얼마나 영악한지 몰라. 잘해주면 우리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려 해요. 저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출근도 안 했는데 나한데 ‘선생님, 도착했어요’ 하고 카톡이 온 거야. 코디 선생님한테 보낸다는 것을 잘못 보냈나 봐. 그리고는 금세 삭제한 거 있지? 그러고 나서 아홉 시 다 되어 왔다니까요.

일부러 어디 들렀다 오는 것 같아요. 그러니 너무 잘해주려 하지 말아요!”


KakaoTalk_20241218_222132965_01.jpg



내 귀는 팔랑귀다. 이쪽 말을 들으면 이쪽이 옳은 것 같고 저쪽 말을 들으면 저쪽이 옳은 것 같은 팔랑귀.

의심을 해야 하나? 좀 더 냉정히 대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유미가 세 번째 지각을 했다. 역시나 혼자

일하던 날. 20분 늦게 온 유미에게 왜 늦었냐 물으니 버스 때문에 늦었다고 대답한다. 그럼 조금 일찍

나와야지, 했더니, 유미는 단박에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만은 늘 선한 미소로 일관하던 유미가

아니었다.

‘안 되겠군, 코디 선생님과 얘기해야겠어.’ 진한 불쾌감으로 점령당한 마음밭에는 아무리 옳은 말인들 싹을

틔워낼 수가 없을 것이기에, 강한 애착의 고리로 연결된 코디 선생님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아마도 코디선생님이라면 차근차근 알아듣게 잘 일러줄 것이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코디선생님은 몹시도 당황한 듯, 진작 얘기해 주시지 그랬냐고, 기승전결이 모두 사과의 말씀뿐이었다.

'뭐지? 죄 없는 이를 무고라도 하는 것 같은 죄스러운 기분! 코디선생님의 당황에 내가 스며든 건가? 정말

당황스럽구먼......'

공동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을 모두 같은 시간대에 출근을 시키는데, 내일부터 그 시간을 좀 당겨 보겠다고,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녀. 지각하면 안 된다는 말을 했더니 유미가 매우 기분이 나쁜 모양이라고, 이해하게끔 잘 말해 달라 부탁을 드렸고, 유미는 그 이후로 정각에 올지언정 지각은 하지 않는다.


지난가을, 추석을 며칠 앞두고 유미가 핸드폰에 저장된 가족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예쁘게 단장한 어린

시절의 유미가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 곁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귀여워. 추석 때 부모님 뵈러 가나, 유미 씨?”

“아니요, 엄마가 음식을 해서 보내주세요.”

장애인이라고 섣부른 연민은 금물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연민의 파도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명절도 부모님과 같이 보낼 수 없다니. 자립도 좋지만 명절만큼은 가족들과 같이 보내도

좋지 않을까. 가족들이 장애를 가진 유미를 부담스러워하는 걸까?


KakaoTalk_20241218_222132965_03.jpg 쳇 GPT 에게 요청해 얻은 그림


이러저러한 이유로 유미는 내게 상념거리를 푸짐하게 안겨주곤 한다. 개미가 행진하는 모습을 닮은 유미의

필체부터, 알아듣기 힘든 어눌한 말투, 해맑은 미소. 혹 유미는 날고 기는 재주를 숨기고 속세에 숨어든

도인이 아닐까. 날로 강팔라 가는 세상, 다정한 마음과 배려와 사랑을 이끌어내기 위해 파견된 도인!

유미는 오늘도 미소로 세상을 평정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오자마자 파마를 했다며 자랑하는 유미.

이쁘다는 소리에 좋아라 하며 거울 앞으로 달려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모습, 귀엽고 조금 수줍은 도인, 유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우고 싶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