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를 사랑하는 시후는, 매일 놀이터를 찾는다. 역치가 높은 아이에게, 그네는 아주 훌륭한 매개체이다.
날아갈 듯 높이 타 부족한 감각을 채우기도 하고, 속도를 조절해 감각을 조절하기도 하는 그네는 타기 시작하면 30분은 넘어야 비로소 만족한다. 그러기에 매일 놀이터에 가야 하지만, 이따금 나의 체력은 따라주지 않는다. 그런 날이면 슬쩍 꾀를 부리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시후는 ‘혼자 할 거야’를 외치기 시작했다.그 시작은 무인상점에서 아이스크림 구매하기였고, 두 번째는 홀로 놀이터행이었다.
욕구가 독립을 부추겼다.
남들 눈엔, 덩치 산만한 9살 남자아이가 단지 내 놀이터 가는 게 무엇이 그렇게 불안한가 싶겠지만, 아이가 나 없이 혼자 문밖을 나가는 것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나로선 선뜻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 나의 불안이 아이의 성장을 막고 서있었다.
그 순간 시율이는 시후와 마음을 함께한다. 옷방에 손을 잡고 들어간 두 녀석이, 문을 닫고 소곤소곤 주고받는 핑퐁대화 끝에, 문이 열렸다.
여전히 맞잡은 굳건한 두 손, 화려한 내복에 걸친 초라한 외투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등교할 때 그렇게 오래 걸리던 옷 입기가, 그렇게 채워지지 않던 외투의 지퍼가 신속하고 야무지게 채워져 있었다. 크록스를 신고 신발장에 선 두 녀석을 서둘러 세웠다.
“차 조심, 다른 친구 그네 타면 기다렸다가 타고,”
“네!’”
불안함에 엘리베이터 앞까지 빼꼼 내민 머리를 시율이는 거침없이 밀어낸다.
“오빠랑 둘이 갈 거야. 엄마 가!”
1층을 누른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내려갔다.서둘러 베란다 창틀에 매달려 아이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고 잠시 뒤, 시율이가 현관을 뛰쳐나오고, 그 뒤를 시후가 잇는다.
호랑이 선생님에게 해방된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나가는 두 녀석은 곧장 놀이터로 향했다.
아이들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쯤 슬리퍼를 신고 모자를 눌러쓰고 놀이터로 향했다. 행여 들키면 안 돼, 놀이터를 감싼 나무 사이에 무릎을 살짝 굽혀 미행을 시작한다. 초록빛 나뭇잎 사이에 담긴 두 녀석은 그저 행복하다.
그네에 나란히 서서, 몸을 앞뒤로 움직여 살랑이는 저녁 바람을 만끽한다. 시후의 까르륵 웃음에, 시율이는 오빠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함께 웃는다. 두 녀석의 미소에, 이상하게 마음이 먹먹해졌다.
얼마 전, 이은경 작가의 ‘나는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라는 신간을 읽었다. 작가님은 작가님의 차남을 ‘5호선의 사나이’라는 애칭을 달아주셨다. 5호선 사나이가 외롭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은 뭉클하면서도 더불어, ‘시후의 독립’에 묵직함을 안겨줬다.
그 책을 읽고 다음 날 시후도 홀로 걸음을 시작했다. 바로, 단지 내 놀이터 행.
30분이 넘어가면 어김없이 그네에서 내려오는 시후는 시율이에게 집에 가자고 재촉한다.이렇게 정확할 수가 없다. 시율이는 또 군말 없이 오빠 의견에 따른다. 참, 이렇게 깊을 수가 없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오늘의 미행을 완수하기 위해선 들키면 안 된다. 분명 슬리퍼를 신었는데 발가락이 땅에 닿는다. 그래도 들키면 안 된다. 이런 날 엘리베이터는 꼭 11층에 있다. 두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는 순간은, 범인을 추격할 때보다 심장 박동수가 더 높다. 쏜살같이 집으로 들어가, 숨을 고르던 그 순간 벨이 울린다.
“누구세요?”
“시후예요!”
구레나룻 끝에 맺힌 땀방울에 개운한 미소는 오늘의 성취감을 대신한다. 그 뒤를 우리 짹짹이 시율의 ‘놀이터 일정 결과보고’로 화려한 마지막을 장식한다.
자녀의 독립은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계이다. 부모는 자녀가 건강하고 성공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아이는 앞으로 다양한 도전과 기회를 통해 부딪히고 다듬어져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간다. 물론, 그 자녀가 장애가 있더라도 예외가 아니다.
자아 성찰, 주거 독립, 경제적 자립 등 점진적인 독립을 통해시후가 말하는 ‘우리 동네’ 안에서 행복한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믿고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