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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쓰는 히말라야 트레킹 일지 0

잃어버린 이름에게

by 김승요



결국 인정해야겠다. 이 여행기를 다시 쓰기 위해서 꼭 찾아야 했지만, 그 친구의 이름을 영영 잃어버렸다.

고백하건대, 이 여행기의 이전 버전은 반은 진실, 반은 거짓된 글이었다. 네팔 포카라에 간 것은 약 8년 전,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인천공항에서 방콕, 방콕에서 포카라까지 대부분의 시간동안 혼자이긴 했지만, 히말라야에 오른 것은 한 수습 가이드와 함께였다. 가이드란 전반적인 트레킹 일정과 길을 안내하고, 일정량의 짐을 나누어 들어주는 고용인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까지 오르내리는 일주일 동안, 누군가의 큰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 꽂혀있던 ‘20대 여자 혼자 떠난 네팔 여행’의 콘셉트에 충실하기 위해, 마치 산까지 혼자 오르고 내린 것처럼 글을 썼다. 돌이켜 보면 자의식과 자기 연민에 매몰되었던 시기였다. (취업 준비를 앞둔 대학 졸업반 시기였단 점, 나의 전공과 관련한 업계는 취업 시장이 남학생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는 점을 참고해 당시 나의 심리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가늠해 달라, 이해해 달라는 뜻은 아니다)


진실을 누락해서 ‘혼자’였음을 한껏 강조한 에세이는 대학 교지에 실렸고, 후에 개인 블로그와 여행 에세이 전문 사이트에도 올라갔다. 물론, 글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글을 썼다는 사실, 그 가이드 친구의 존재를 지워 버렸다는 사실을 '나 만은'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죄악감으로 몇 년간 마음 한구석에 곰팡이가 핀 것처럼 불편했다. 심지어 그 친구의 이름을 까맣게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걸 핑계로 내내 여행기를 고치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예전에 썼던 기록물을 샅샅이 뒤져보건, 트레킹 가이드 업체로부터 온 메일을 찾아보건 하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굳이’ 시간과 정성을 내어 그러지는 않았던 거다.


비단 이 일 말고도, 내 안에는 비슷한 종류의 몇 가지 부채감이 있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은 작은 벌레가 열매 속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듯이, 은근하게 나를 좀먹고 있다. 안 그래도 에너지 총량이 많지 않은 나의 신경을 자꾸만 닳게 하는, 부채감. 나는 그것을 ‘죄의식’이라고 일컫기 시작했는데, 그 죄의식 중 하나를 털어내기 위해 이 묵은 여행기를 꺼내어 고쳐 쓰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친구의 이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트레킹 6일 차 하산하는 길, 인터넷이 터지자마자 우리는 서로의 페이스북 계정을 팔로우했다. 하지만 1년 뒤 내 실수로 연락이 끊겨 버렸다. 계정을 잠시 비활성화하려다가 영구 삭제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끝내 이름을 찾지 못하면 여행기 내내 대명사로 쓸 수밖에 없다. 익명으로 표기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이름에 알파벳 ‘K’가 들어갔고 나는 그를 세 음절로 불렀던 것 같은데…….




[그의 이름을 찾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3 Sisters Adventure' 가이드 업체와 주고받은 메일 뒤져보기

→ 8년 전 받은 메일을 읽어보았지만, 내용에도, 첨부된 서류에도 어시스트 가이드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3 Sisters Adventure' 홈페이지에서 직원 찾아보기

-> 열 일곱 명의 팀원 중에 내가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퇴사한 듯하다.


여행 계획 관련 서류 파일 뒤져보기

→ 대학생 때부터 5번이나 이사했다. 서류 파일을 찾을 수 없다. 옛날에 쓰던 다이어리까지 뒤적이다가 딴짓만 실컷 해버렸다.


당시 들고 갔던 핸드폰의 메모 앱 뒤져보기

→ 어떤 핸드폰이었지? LG폰 둘 중에 하나였는데, 기억이 안 나서 더 옛날에 쓰던 기종부터 충전 중이다. 그러고 보니 두 대 모두 보라색이구나. 10대와 20대 초반까지는 보라색을 좋아했다. 지금은 좋아하는 색깔이 없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선호하는 색은 있겠지만, 그게 어떤 색인지는 모르겠다.


5% 충전이 되니 핸드폰이 켜졌다. 사진첩을 열어 확인해 보자. 트레킹 당시 쓰던 핸드폰이 맞다. 특히 네팔 여행 때 찍은 핸드폰 카메라 사진을 모은 폴더가 따로 있다. 68장의 사진 중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진은 딱 세 장.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찍힌 풍경 사진 세 장과, 트레킹 경로를 적은 그의 손 글씨 메모 사진 한 장이다.


오래된 사진들을 보며 추억에 잠겨 버렸다. 네팔 여행 사진뿐만 아니라, 반려견 방글이의 어릴 적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내 대학 시절 사진을 죽 훑었다. 졸업을 기념하며 떠난 홍콩 여행 사진도 있다. 심지어 며칠 전 홍콩에 다녀와서 더욱 감회가 새롭다. 그렇게 사진첩을 보며 웃기도 하고 가벼운 향수에 젖어 한 시간 가량을 보냈다. 음, 근데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아, 히말라야에서 틈틈이 핸드폰을 켜서 적은 메모를 찾으려고 했지. 그런데 메모 앱이 없다. 왜지? 내가 삭제한 걸까? 이유가 뭐였을까? 아무리 봐도 앱이 없다.


수확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당시 썼던 맵스미 앱과 여행 전 세운 트레킹 계획이 적힌 A4용지 사진 몇 장. 내용을 읽어보니 카메라는 당시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구매했던 것이구나. 이 미러리스 카메라는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언제부터 이 카메라와 함께 여행을 다닌 건지 깨닫고 보니 새삼 뭉클한 기분에 잠긴다. 아니, 젠장, 집중 좀 하자. 그래서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끝내 그 친구의 이름을 찾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혹시 메모 앱을 백업하면서 그다음에 쓴 핸드폰에 옮긴 것은 아닐까? 희망을 품으며 이후에 나온 기종의 LG폰에 충전 케이블을 꽂는다. 오, 여기엔 QuickMemo+앱이 있다! 그런데 실행하려면 최신 버전을 설치하란다. 하…, 그래, 이 정도야 어렵지 않다. 업데이트까지 하고 앱을 열어 보니 히말라야에서 쓴 메모는 가장 아래에 있었다. 총 세 개의 메모가 있었는데,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어 보지만, 그중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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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방법조차 실패였다. 이젠 집착을 내려놓고 내 과오를 마주해야 한다. 여행기를 고쳐 쓰기 위해서는 그의 이름이 꼭 필요하다고, 찾기 전엔 어쩔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회피 행위일지도……. 그러니 유일하게 기억나는, ‘K’라는 이니셜로 대신해 쓸 수밖에 없다. 그 알파벳 한 글자를 볼 때마다 작은 답답함을 느끼겠지만, 그 정도는 어렸을 적 과하게 가졌던 자의식의 업보를 치르는 것이려니.


미안해, K, 결국 너의 이름을 잊어서. 나의 짐, 속세에서 가지고 온 업보라고도 하는 배낭 속 짐의 무게를 나눠 이고 함께 걸어 준 고마운 당신의 이름을 잃어버렸어.


자, 이 정도 무게의 죄악감은 기꺼이 손가락에 업고 여행기를 고쳐 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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