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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쓰는 히말라야 트레킹 일지 2

1일차_깐데에서 란드룩까지

by 김승요
그림2.jpg 1일차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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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커피 한 잔 마신 뒤 짐을 챙겨 나왔다. 트레킹 장비는 포카라에서 마련하겠다는, 얕은 계획성으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다행히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등산 스틱과 30리터 정도 되는 배낭을 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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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isters Adventure 건물 바로 앞으로 차량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K와 함께 어색하게 차를 기다리며, 페와 호수를 멀뚱히 바라보고 섰다. 옆에는 검은 소 한 마리가 벌러덩 누워 있었다. ‘행운을 빌어주라’ 생각하며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네팔 사람들과 다르게, 소가 나의 신은 아니라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날씨가 안 좋으면 어쩌나, 고산병 때문에 중간에 다시 하산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밀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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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 나이 만 스물 셋, 그 나이대 여자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청소년기에 접어 든 이후로 문득문득, 당장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걱정이 튀어 오르곤 했다. 하지만 여행을 할 때만은 불안을 기대감이 눌러 이기는, 그런 근사한 순간을 맞곤 했다. 지금도 여행은 ‘내게 닥쳐올 모든 일이 어떻게든 잘 풀릴 것만 같다’는, 그런 고양감을 준다. 그것은 도핑을 하는 것 같기도, 아니면 편도체에 마취주사를 맞은 것 같기도 한 느낌이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신앙적 도파민 비스무리한 것일 수도 있겠고.


DSC00466.JPG 깐데로 가는 택시 안에서


깐데 कान्दे Kande


깐데의 초입부. 일반적으로는 트레킹을 끝내는 지점이지만, 우리에게는 시작점이었다. 한국에서 ABC 트레킹에 대해 검색해보고 대강 예습했던 루트를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것이었다. 길이 막히면 이렇게 반대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니. 트레커들의 기대나 열의보다는 후련함 내지는 공허함이 머무는 곳이라서인가, 예상보다 훨씬 인적이 드물고 고요했다.


DSC00468.JPG 깐데의 트레킹 로드 초입, 앞장 서는 K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바위와 풀숲으로 이어진 작고 좁은 골짜기로 더 걸어 들어가면 톨킨이 만들어낸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몽롱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곧 현실을 마주했다. 길이 가파른 계단으로 쭉 이어졌는데, 트레킹을 시작한지 두 시간도 안된 시점에 벌써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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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구세주처럼 등장한 그 작은 가게가 아니었더라면 트레킹 첫날부터 ‘왜 내가 이런 개고생을 사서 하고 있나’ 하며 후회막심,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진심으로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할아버지 한 분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진저레몬티를 한 잔 주문해서 가게 앞 덜그럭거리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마셨더니, 다시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강차를 마시다니! 그것부터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김치에 들어간 작은 생강이라도 씹자마자 구역질해버리는 나다. 체질적으로 몸에서 생강을 밀어내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평생 자의로 입에 대어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저레몬티가 생명수였다. 내 몸이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혐오하던 생강의 도움을 받고 기운 차린 나는 벌떡 일어나 가방을 다시 맸다. 한국과는 조금 다르게 생겨서 생경한 나비와 잠자리가 친한 척하며 발 디디는 앞길마다 방해하는 것이 귀여웠다. 스틱이 돌계단에 통통 부딪히는 소리조차 기분 좋게 들렸다. 그렇게 힘을 내서 열심히 걸어 한 시간 정도 오르다 보니 오스트레일리안 베이스 캠프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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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478.JPG 안개 낀 오스트레일리안 베이스 캠프


오스트레일리안 베이스 캠프의 원래 이름은 너른 목초지를 뜻하는 ‘툴로 하르카(Thulo Kharka)’였으나, 1980년대 후반에 오스트리아인들이 이곳에서 며칠 동안 캠핑을 한 이후로 자주 방문하면서, 현지인들이 ‘오스트리안 캠프(Austrian Camp)’라고 부르게 됐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는 ‘오스트레일리안’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에 단어가 변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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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하고 포카라에서 사오지 않은 우비를 이곳에서 구입하고자 했다. 이런 자잘한 산악용 물품은 ‘당연히’ 롯지에서 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비를 팔지 않는다고 해서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우비 없이는 히말라야에 오를 수 없다. 내가 몬순의 트레킹을 너무 쉽게 생각했나, 뭐든 대충대충 넘어가는 성격이 불러온 사태였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이 수완을 발휘한 것이다. 실력 좋은 조각가가 콧대를 정성 들여 깎은 듯 아주 잘생긴 네팔리 청년이었다. 그는 캠프에 있던 큰 플라스틱 비닐봉투를 잘라서 감투처럼 만들어 주었다. 이 간이 우비는 기성품에 비하면 불편하기는 했으나, 트레킹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그로 인한 체온손실을 막아 주기에는 부족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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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하게 채운 배와 수수한 우비를 얻고 오스트레일리안 베이스 캠프에서 출발해 포타나로 향하는 길을 한동안 걷는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있었다. 풀숲에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그것을 본 우린 어쩔 줄 모르고 근처를 서성였다. K는 어떤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나처럼 그 자리에 서서 상황을 판단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곧 반대편에서 두 사람이 걸어왔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부자는 쓰러진 노인과 이웃지간인지, 이 상황이 늘상 있는 일이라는 양 킬킬대며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옆에 널브러져 있던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안심시켰다. 장난기 어린 눈빛이 닮은 부자였다. 그제서야 우리도 웃으며 걸음을 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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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우림 평지가 나왔는데, 이때 트레킹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 낀 풀숲에 비까지 내리니, 내가 발 딛고 살던 세계가 아닌 듯 보였다. 솜털이 살짝 서서 주변 공기의 흐름에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동시에 편안했다.


종종 집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때, 암적응이 되기 전까지 깜깜한 어둠 속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있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내게 묘한 흥분과 안정감을 동시에 주기 때문이다. 안전한 장소에서 힘을 빼고 몸을 축 늘어트린 상태보다, 그것이 오히려 가장 편안하고 나 다운 상태라고 짐작한다. 당시 우림을 걸으면서 그것과 비슷한 긴장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마주친 하산 중인 서양인 트레커가 건넨 ‘Hi’라는 인사 한마디가 나를 다시 현실로 돌려 놓았다. 비도 금방 그쳤다.


DSC00505_mix01.jpg 톨카로 가는 길. 이렇게 비교적 낮은 지대에선 소를 마주칠 수 있다. 네팔에선 소가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이 다른 동물들이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과 다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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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카 तोल्का Tolka


작은 마을, 톨카 사람들은 미적 감각이 뛰어난 게 분명하다. 집집마다 꽃을 키우고 전망도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니. 천진하게 뛰어 놀던 톨카의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레 예술이 무엇인지 배울 것이다. 사이 좋게 어깨동무하고 걷는 톨카 삼총사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작은 어깨에 서로의 가는 팔이 얽히고 설키었다.


DSC00517_mix01.jpg 톨카의 골짜기 뷰


어린 아이 셋이 모이면 제법 그럴듯한 모험담이 만들어지는 법. 그들은 이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어떤 역할극을 하고 놀지, 어떤 이야기를 같이 만들어 가고 있을지 궁금했다.



란드룩 लान्द्रुक Landr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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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533_mix01.jpg 첫날 머문 란드룩의 롯지. 가장 좋은 롯지였다.


첫날 목표 지점인 란드룩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허름해서 놀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방 안에 콘센트가 있는 유일한 롯지였다. 먼저 도착해 있던 한 트레커 무리가 저녁식사 중이었다. 동아시아인으로 보이는 그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배정 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같은 방에서 함께 자게 될 줄 알았는데, K는 다른 방을 쓴다고 했다. 추측하건대 대부분의 롯지마다 가이드와 포터가 묵는 방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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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은 뒤 식사를 하는 동안 란드룩과 산 건너편 마을 간드룩에는 점점 불이 켜지고 있었다. 잠시 그 변화를 지켜보다가 슬슬 추워져 방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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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머리에서 마주보는 벽엔 큰 나방이 붙어있고 시트는 축축했다. 바람막이를 침대에 깔고 자는 까탈스러운 짓을 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현실감 없이 묘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얼굴에 닿는 방 안의 공기가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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