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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쓰는 히말라야 트레킹 일지 3

2일차_란드룩에서 로워시누와까지

by 김승요


우울한 사람은 보통 새벽까지 잠 못 이룬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반대로 잠이 굉장히 많은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현실이 싫어 꿈나라로 도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 역시 잠이 너무 많은데, 여행지에선 항상 이른 아침, 저절로 눈이 뜨인다. 그래서 여행이 좋다. 하루 아홉에서 열 시간 수면을 취하면서, 겨우 눈 떠있는 시간도 멍하니 흘려 보내곤 하는 내가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특별하고 드문 일이니까.


트레킹 내내 아침 대여섯시에 일어나 찬 물로 세수를 하고, 밥 잘 먹고 짐을 챙기는 시간은 의욕으로 가득 차, 감히 걱정 고민 따위가 엉덩이를 들이 밀 공간이 없다.


“수버딘 (좋은 하루 되세요).”


롯지 주인에게 숙박료와 식사비를 한꺼번에 지불하며 간단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히말라야에서의 하루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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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544.JPG 출발한지 얼마 안 돼 마주친 옥수수밭
DSC00567.JPG 아침 일찍 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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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541.JPG ‘란드룩’은 폭포라는 의미의 이름인데, 확실히 크고 작은 폭포수가 많이 보였다.


뉴브릿지 न्यु ब्रिज New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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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브릿지의 길고 긴 다리를 K가 앞장 서서 걸었다. 폭이 좁은 나무 다리 밑으로는 모디(Modi) 강의 물살이 빠르게 흘렀다. 비가 와서 물살이 거세진 상태였다. 발을 디딜 때마다 다리가 출렁거렸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옆으로 몸이 기울어 헛디디면 크게 다치거나 끝장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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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555_mix01.jpg 중간에 콜라를 마시러 들린 가게에서 본 아기고양이. 예사롭지 않게 작았다.
DSC00557_mix01.jpg 주먹 만한 크기였지만 제법 이목구비는 날카롭다.


네팔 오기 전까지만해도 탄산 음료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산행길엔 콜라가 그렇게나 맛있게 느껴졌다. 진저레몬티와 마찬가지로 생명수 같았다. 이때부터 등산할 때 콜라를 마시는, 안 좋은 버릇이 생겼다. (사실 버릇이라고 말하기엔 민망하다. 히말라야 트레킹 이후로 등산을 한 건 손에 꼽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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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누단다 झिनु दाँडा Jhinu Danda


란드룩에서 뉴브릿지, 지누단다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아니라서 몸이 힘들진 않았지만, 거머리와 싸우느라 고생했다. 거머리에 소금이 닿으면 삼투압 현상으로 죽는다며 K가 미리 챙겨온 소금을 건넸다. 내가 대충 신발 겉에만 바르는 걸 보더니 아예 한 움큼 집어 신발과 양말 사이에 채워 넣어야 한다고 시범을 보여줬다. 그제야 나도 김장철 배춧잎 속에 소금 넣듯이, 걷는 틈틈이 신발과 양말에 소금을 묻혔다.


하지만 아무리 발에 소금을 치덕치덕 발랐다고 해도 안심하기엔 일렀다. 거머리는 땅에서 올라올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뚝 떨어진다. 교묘하게 나뭇잎에 매복해 있다가 내 등 속으로 들어온 건지, 지누단다를 지나는 길에 점심을 먹는 중 K가 내 등허리 쪽을 가리키며 기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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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까, 상의 뒤쪽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황 판단이 잘 안돼서 나무에 긁혀 살이 찢어진 건가 싶었는데, 곧바로 거머리의 소행이란 걸 깨달았다. 급히 상의를 들어 현행범을 검거하려고 보니 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트레킹을 준비하며 거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기껏해야 모기보다 조금 더 피를 빨아가겠거니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포식하더라도 머문 자리는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갈 것이지, 식탁을 이렇게 피범벅으로 만들어 놓다니.


DSC00569_mix01.jpg 염소를 이끌고 계단을 내려오는 중인 나이 든 친절한 목동.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장면이다.


촘롱 चोमरोङ Chhomrong


DSC00598_mix01.jpg 천국 가는 촘롱의 계단


촘롱, 공포의 촘롱! 가파른 계단이 정말이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점점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지럽기까지 해서 브래지어 후크를 풀어버렸더니 그것 만으로도 좀 살 것 같았다. 트레킹 할 땐, 갈비뼈를 죄는 브래지어 따위는 아예 안 입는 게 나을 것 같지만, 네팔의 문화를 잘 몰라서 일단 후크만 풀고 다녔다. 당시는 여자라면 당연히, 브래지어를 착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어쨌거나 지누단다에서 촘롱 가는 길은 딱 죽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족쇄가 없었어도 비슷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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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절 직전의 상태로 도착한 촘롱은 정말 아름다웠다. 롯지도 다른 마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잘 꾸며 놨고 그 수도 많았다. 위치도 좋은 게, 첩첩산중 사이로 설산이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낮인데도 벌써 한 자리 잡고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는 서양인 트레커들이 몇 명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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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의 롯지들이 이렇게 시설도 좋고 예쁜 이유는, 오고 가는 길이 너무 고되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친 산행객들이 쉬어 가야만 하는 곳이니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않았을까? 나도 아예 이곳에 숙소를 잡고 남은 하루는 쉬어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렇지만 아직 벌건 대낮이었거니와 갈 길이 멀었다. 이 마을의 롯지에선 하산하는 길에 머물기로 했다.


DSC00593.JPG 촘롱의 롯지는 총 15군데. 다른 마을보다 확연히 많다.
DSC00591.JPG 촘롱의 체크포인트. 여행자는 꼭 체크 포인트마다 들러 팀스와 퍼밋을 체크 받아야한다. 팀스는 여행자의 정보가 등록된 여권과 같은 역할, 퍼밋은 입산허가증과 같은 역할을 한다.


TIMS(Trekkers' Information Management System) 카드: 모든 트레커가 안전을 위해 의무적으로 발급받아야 하는 허가증이다. 카트만두나 포카라의 네팔 관광청에서 발급받을 수 있다.

Permit(국립공원 입장 허가증): 안나푸르나 보호구역이나 사가르마타 국립공원 등 특정 지역을 트레킹할 때는 해당 지역의 입장 허가증이 필요하다. TIMS 카드를 발급 받을 때 함께 받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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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을 지나 체크포인트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기 위해 바지를 내리자, 뭔가 툭하고 떨어졌다. 지누단다에서 찾지 못한 거머리였다. 만족스러울 만큼 배를 채운 건지, 엄지손톱만치 통통해져 미련 없이 떠나가는 거머리…. 여간 얄미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람을 ‘거머리 같다’고 표현하지 않나, 그 비유가 말 그대로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배고플 땐 끈질기게 달라붙다가, 이득만 취하고 홀연 떠나는 사람’이라고 의미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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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을 지났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조금 내리막길을 걷고 나면 계단길이 한 시간 가량 더 이어진다. 이젠 천국의 계단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이건 지옥의 계단이었다. 그래도 이제 진짜 마지막이겠지 싶어 더 힘을 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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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603.JPG 중간중간 마주치는 동물들은 그 존재만으로 에너지를 나눠준다.


시누와 सिनुवा Sinuwa


원래 이 날은 어퍼시누와까지 가는 계획이었지만, 내가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K가 로워시누와에서 머무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 그 반가운 제안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가지 못한 길은 내일 마저 걸으면 되지. 이곳의 롯지가 너무 예뻐서 보자마자 마음을 뺏긴 것도 한 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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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616_mix01.jpg 로워시누와의 컬러풀한 롯지


전망도 좋아서 마당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홀로 앉아 쉬기에 완벽했다. 어느 정도 해발고도가 높아지면 롯지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가져간 전자기기의 배터리를 아껴서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큰 마음 먹고 핸드폰을 켜서 음악을 들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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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야무지게 남기고. 그러고 보니 거머리가 피를 빨고 간 자국이 다리에도 있었다.


<히말라야 트레킹 당시의 플레이리스트>

이문세 - 깊은 밤을 날아서
George Benson -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
짙은 - The End
윤상 - 한걸음 더
신해철 - 그대에게
f(x) - Airplane
이승환 - 덩크 슛
오마이걸 - WINDY DAY
디어(d.ear) - 너를 그리다
알음다름 - 파도야부탁해
위아더나잇(We Are The Night) - 서로는 서로가
Nina Simone - Mood Indigo
スキマスイッチ(스키마 스위치) - 全力少年(전력소년)
NCT 127 – Summer 127


DSC00607.JPG 롯지의 뷰


음식을 씹을 힘이 없었다. 이른 밤을 맞이하기 전에 간단하게 구룽빵, 갈릭수프, 진저레몬티를 주문해 저녁 식사로 먹었다. 구룽빵은 구룽족이 주로 아침 식사로 먹는 네팔 전통 빵인데, 꿀이나 잼을 발라 먹으면 정말 맛있다. 폭신하고 쫄깃한 식감이라 입에 잘 맞아 매일 먹었다.


DSC00638.JPG 히말라야에서 주식이 되어 준 맛난 구룽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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