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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쓰는 히말라야 트레킹 일지 4

3일차_로워시누와에서 히말라야 롯지까지_마보이와의 첫만남

by 김승요
3일차 루트.jpg 3일차 목표 루트


나는 산을 오르는 속도가 느린 편이라 늘 새벽 일찍 일어나 출발했다. 이날은 처음부터 길이 가팔랐다. 역시, 전날 어퍼시누와까지 올라가는 건 무리였을 테다. 로워시누와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길 잘한 거다. K는 그간 내가 산을 오르는 걸 지켜보며 남은 체력을 가늠했나 보다. 아직 수습 가이드지만, 그의 감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거나 지루한 시간을 견딜 방법으로 공상과 연상만한 게 없다. 트레킹 중에는 종종 내가 골목쟁이네 프로도가 된 상상을 했다. 프로도는 반지 원정대 구성원 중 오크와 직접적으로 전투하지는 않되, 절대반지를 직접 들고 운반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인물이다. 그는 아라곤이나 간달프처럼 누가 봐도 멋지고, 능력이 출중해 믿음직스럽고, 심지어 영웅스러운 말투나 외형을 갖지도 않았지만, 야망 없고 평화주의적인 성향 덕에 역설적으로 절대반지를 운명의 산까지 운반하고 파괴할 수 있었다. 막바지에 다다라서는 유혹에 굴복하기도 했지만, 그런 모습에서조차 동질감을 느꼈다. 영화를 보며 나 역시 프로도와 거의 비슷한 선택을 했으리라 여겼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나 같이 평범하고 욕심 없는 사람도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될 수 있구나(?) 라는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해주었기에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내게 특별한 것이다.


그런데 히말라야를 걸어 보니 그가 괜히 주인공인 게 아니었고, 그에게 자신을 투영한 내가 오만했단 걸 깨달았다. 왜냐, 내 변변찮은 체력으로는 그 험하고 먼 길을 이동할 수 없다! 비틀비틀 걷다 중간에 쓰러지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절벽 밑으로 떨어지거나 그저 처량한 죽음을 맞았을 거다. 프로도에게 느꼈던 동질감이 히말라야 트레킹 이후로는 존경심으로 바뀌었다.


DSC00630.JPG 트레킹 코스 중반까지는 길에 소나 말의 똥이 많았다. 처음엔 밟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시간이 흐르고 몸이 힘들어질수록 밟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게 됐다.
DSC00629.JPG 점점 가까워지는 마차푸라레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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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부 बाँबु Bamb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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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부까지 가는 길은 다시 정글 같았고, 이후 도반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나무 숲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밀림.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드문드문 보였고, 이끼로 뒤덮인 숲이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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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 롯지에 같이 묵은 트레커 무리를 엎치락뒤치락 계속 마주쳤다. 이 사람들과는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계속 마주쳐서 종종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온 관광객이라고 섣불리 짐작했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더니 카트만두에서 온 네팔리라고 했다. 건강한 눈빛을 가진 젊은 부부 한 쌍과 친구 한 명. 세 사람 모두 호탕한 성격으로 트레킹 내내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그때마다 한결 같이 웃어주었다. 나보다 경험과 체력이 월등해 더 빨리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자주 쉬고 사진을 찍으면서 여유로운 트레킹을 즐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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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목표를 설정하고 게임 퀘스트 깨듯이 서둘러 코스를 오르는 트레커는 거의 한국인들 뿐이었다. 그간 마주친 서양인 트레커나 네팔리 트레커는 산 속에 발 딛고 서있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물론 당시 나도 자연 경관을 한껏 즐기긴 했다. 하지만 그 과정보다는 ‘일주일 안에 ABC 코스 완주하기’라는 목표에 우선 순위를 두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히말라야 हिमालय Himal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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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롯지는 어딜 보아도 멋진 풍경에 둘러싸여 있지만, 시설은 최악이었다. 그저 이곳에 먹고 잘 곳이 있음에 감사해야 할 뿐이었다. 주인장을 비롯해 모든 직원이 퉁명스럽기도 했다. 그중 가장 어린, 조금 주눅 들어 있는 소년만이 유일하게 친절했다.


DSC00676.JPG 연무로 뒤덮인 히말라야 롯지


롯지 주변 풍경과 새들의 사진을 찍다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 부슬비를 피해 방문 앞 플라스틱 의자에 눕다시피 늘어져 앉았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인 이문세의 ‘깊은 밤을 날아서’를 흥얼거렸다. 촘롱에서 천국의 계단을 오를 때도 주문처럼 끝없이 되뇌었던 노래다. 이제는 정말 핸드폰 배터리를 최대한 아끼기 위해서 노래를 듣기보다 부르는 것을 택해야 했다.


DSC00708_mix01.jpg 히말라야 롯지의 까만 새


그렇게 처마 밑에서 혼자 쉬는데, 촘롱에서 스치듯 마주쳤던 백인 부자가 롯지에 도착했다. 그들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대화를 좀 나눠보니 그들은 폴란드인이고 소년은 15살이었다. 아들에게 무등을 태워주며 놀고, 다리 마사지도 해주는 다정한 아버지를 가진 소년. 내가 그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와 함께 만든 잊지 못할 추억 한 켠에는 키가 작은 동양인 누나의 자리도 있다면 좋을 텐데. 수줍은 성격인지 소년은 낯을 가렸는데, 우리는 롯지에 살고 있는 검은 개를 말없이 함께 쓰다듬었다. 정말 순하고 애교가 많은 개였다. 잠시 후 그 개는 롯지 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식당 앞에 있는 쓰레기통을 엎었다. 우리는 ‘배드 보이’라고 부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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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걸 본 롯지 주인이 긴 막대기를 들어 개를 때리려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당연히’ 장난인 줄 알고 웃었지만,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나서 개를 때리는 것 보고 폴란드인 아저씨와 함께 그를 말렸다. 왜 개를 때리느냐고 물었더니 매일 쓰레기통을 엎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후에 롯지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개밥그릇이 없었다. 왜 개가 쓰레기통을 매일 뒤지는지 알 것 같았다. 히말라야에서 내가 본 몇몇 사람들은 개를 괴롭혔다. 발로 차거나, 이유 없이 물을 끼얹으며 낄낄대곤 했다. 여행을 오기 전에 인도나 네팔에 가면 길거리의 개가 사나우니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경고를 몇 번 들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눈길을 조금만 줘도 호박색의 착한 눈을 반짝거리며 꼬리를 살랑대곤 했다. 개들이 사납다기보단 사람들이 개에게 못되게 구는 듯했다.


DSC00720_mix01.jpg 후에 아주 좋은 트레킹 메이트가 된 히말라야 롯지의 검은 개. 주인에게 혼이 난 직후라 살짝 기가 죽은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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