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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쓰는 히말라야 트레킹 일지 6

5일차_A.B.C에서 촘롱까지

by 김승요


그래도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다시 희망이 들어섰다. 그 전날 저녁에 K가 날 위로하며 말하기를, 이른 시각에는 잠깐 안개가 걷혀 안나푸르나봉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벌떡 일어나 조용히 옷을 껴입고 나갔다. 처음으로 K와 같은 방에서 함께 잔 날이었다.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푹 자고 기력을 보충해서 그런가, 고산증세는 싹 가셔 있었다. 마치 트레킹을 시작한 날인 것처럼 힘차게 롯지 뒤에 있는 언덕을 올랐다. 설레는 마음으로 뛰어 올라가자, 마보이도 꼬리를 흔들며 쫓아 올라왔다. 전날 밤 캠프의 개들이 마보이에게 텃세를 부리길래, 몰래 방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더니 자꾸 침대 위로 올라오려 해서 결국 방 밖에서 재웠더랬다. 개 한 마리 숙소 침대에서 재우는 게 뭐 그리 크게 그릇될 짓이라고, 이 샌님, 쫄보! 화를 내며 종아리를 꽉 물어도 할 말이 없었는데. 매몰찼던 나에게 토라져 있을 줄 알았더니,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음에 더 미안했다.


DSC00879.JPG 굿모닝, 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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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안나푸르나 산군은 한 시간 가량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눈으로 덮여 눈부시게 새하얀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게 내가 꼭 보고 싶은 장면이었나? 해발 4,000m를 올라오니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10km는 떨어져 있어 여전히 닿지 못할 산봉우리였다.



난 어떤 황홀경을 기대하며 트레킹을 시작한 것일까? 이 순간을 위해 며칠 간 산행한 건데……. 그래, 정말 아름답기는 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감동적이진 않았다. 반면 새까만 개 한 마리는 지금 당장 내 다리 옆에 궁둥이를 붙여 앉아 따끈한 온기를 나눠 주고 있었다. 안나푸르나와 마보이, 둘 중 더 경이로운 쪽은 후자였다.


20170720_065106.jpg 그래도 사진은 많이 남겨 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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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26.jpg 안나푸르나 산군을 배경으로 마보이와 한 컷. 그런데 마보이가 너무 까매서 잘 안 보인다.


5일차 루트.jpg 5일차, 하산 첫째 날의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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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미련이 없어진 ABC를 뒤로하고 이제 다시 내려가기 위해 롯지를 나섰다. 자연스레 마보이도 동행한다. 함께 한지 사흘째라 이젠 그가 옆에 있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MBC를 향하여, 그와 함께 올랐던 꽃밭을 다시 내려갔다.


이때 나는 앞에 있는 무언가를 쫓듯이 서둘러 하산했다. 다음 날 포카라에 해가 떠있을 때 도착하기 위함이었다. 카트만두로 가기 전 포카라 시내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안나푸르나에서 페와 호수로 목표가 바뀐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 아래서 보낼 미래를 위해 정작 발 딛은 현재를 빠르게 흘려 보냈던 것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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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길, MBC 롯지에서 폴란드인 부자를 다시 만났다. 그들에게 안나푸르나에 대한 짧은 감상을 들려주고, 이른 점심으로 빵과 커피를 함께 먹었다. 그리고 내려가면서 마보이와 함께 먹을 구룽빵을 잊지 않고 사서 가방에 챙겼다. 그러나 롯지를 떠나기 전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마보이가 사라져버렸다. 늘 그랬듯이 알아서 따라 오겠지 싶어 먼저 길을 나섰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록 마보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허무하지만, 그게 마보이와의 이별이었다. 언젠간 헤어지겠거니 생각했지만, 이렇게 인사도 없이 홀연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는데. 가슴을 절절하게 울리는 작별 장면 같은 건 없었다. 이 여행기를 읽는 사람들에겐 그와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이 주연 캐릭터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하차시켜 버린, 어설프게 쓰인 아마추어 작가의 각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느낀 유대가 어느 정도의 깊이였는가와는 상관없이 마보이는 정말로 그렇게 떠나 버렸다.


나의 생에 히말라야 트레킹은 딱 한 번이라(아직까지는), 여정에 등장한 이들 하나하나 뚜렷한 인상을 남기었지만, 마보이에게 히말라야 트레킹은 일상이었을테니. 나에게 마보이는 주연이었고, 마보이에게 나는 엑스트라였대도 전혀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마 마보이는 곧 ABC로 올라갈 폴란드인 부자를 자신의 새로운 트레킹 메이트로 선택했을 것이다.


DSC00940_mix01.jpg 안개 속에서 한마리씩 나타난 백마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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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보이와 헤어진 이후, 무리해서 열 시간 동안 촘롱까지 쭉 걸었다. 이날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간이 비닐 우비를 뒤집어쓴 채 죽음의 계단을 다시 만났다. 길고 긴 시간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올라가는 대로 힘들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내려가는 움직임도 무릎 관절과 허벅지 근육에 큰 고통을 준다. 그 가운데서의 한 시간 가량은 난생처음 '내가 제법 끈기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물론, 계속 다리를 놀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더 이상 걷기 힘들다며 데굴데굴 굴러 내려갈 수는 없지 않은가.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 때는 ‘깊은 밤을 날아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불렀다. 그렇게 열댓 번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촘롱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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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가득 채운 안개 때문에, 며칠 전 만난 푸르고 아름다운 촘롱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올라갈 때 봐 두었던 롯지에 들어가자, 성격 좋아 보이는 주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느새 어둑해진데다, 무리한 하루여서 조금 추운 느낌이 들었다. 얼른 저녁을 먹고 쉬어야 했다. 이탈리아에서 살다 왔다는 수다스러운 롯지 주인이 만든 볶음밥은 소금에 절인 맛이 났고 안에서 벌레까지 나왔지만, 이제 벌레가 밥에서 나오든, 침대에서 나오든, 내 옷 안에서 기어 나오든 나는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 상태였다.


다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던 여행자는 며칠째 이곳에서 묵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오르는 길에 본 얼굴이었다. 롯지 마당에서 책을 읽던 사람이다. 그는 일행이 있지만, 고산 증세 때문에 혼자 트레킹을 포기하고 촘롱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 오늘 어디서부터 내려오는 길이냐고 묻길래 ABC에서 출발했다고 대답하니 기겁을 했다. 그는 내게 몇 번이고 괜찮냐고 물었다. 장기 산행이 익숙한 K의 몸 상태는 괜찮을지 몰라도, 사실 나는 다리가 녹아 내릴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래도 버틸 만하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난 의지의 한국인이니까…라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닌 허세를 부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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