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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쓰는 히말라야 트레킹 일지 1

포카라에 짐 풀기

by 김승요


흘러가는 구름 하나하나가 다 부처입니다.

이해선 저, 「인연, 언젠가 만날」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의, 가장 좋아하는 구절. 이 구질구질하고 낭만적인 여행은 저 사소한 문장 하나로부터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세계 각지의 여행 가이드북, 에세이를 모으는 걸 좋아했던 내가 그 많고 많은 땅 중에 라다크에 가장 묵직하게 마음을 내준 이유는 그 단 한 구절 때문이었다.


저자가 주변 모든 것을 부처로 느꼈다는 고원을 내 젊어서든 나이를 먹어서든 홀로 올라 보리라, 호기롭게 결심했던 걸 잊지 않았지만. 인도는 여자 혼자 여행하기 위험하단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리고 티베트는 입국 과정이 까다로워서, 할 수 없이 그 두 나라 여행은 좀 더 나이 든 나에게 양보하기로 하고, 젊은 나는 차선으로 그 바로 밑에 위치한 네팔에 향하기로 했다. 이들은 어쨌든 히말라야를 공유하므로, 산봉우리마다 스치는 부처까지도 공유할 테니.


네팔 포카라 트레킹 vs. 인도 라다크 트레킹

두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라다크는 몬순(monsoon, 우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며 외딴 사막에 가깝고, 포카라는 좀더 다양한 식생을 즐길 수 있고 트레킹 관광 인프라가 비교적 잘 발달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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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처음 사 먹어 본 음식, 애플파이


네팔에 가기 전 며칠을 태국에서 보냈기에, 방콕에서 카트만두 공항으로 향하는 국제선, 그리고 카트만두 공항에서 포카라로 향하는 국내선 비행기를 연이어 탔다. 터미널에서 처음 사 먹은 네팔 현지 빵 맛이 괜찮았다. 덕분에 첫인상이 좋았다.


카트만두에서는 외국인 여행객이 그래도 몇 명 보였지만, 트레킹 비수기라 그런지 포카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다른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 비수기인 이유는 우기라서다. 1년 내릴 비의 80%가 6월부터 9월에 몰아 내린다. 하지만 이날은 다행히 날씨가 나쁘지 않아서 비행기가 제시간에 떴다. 막히는 것 하나 없이 여행의 시작이 순조로웠다.


DSC00358.JPG 왼쪽에 머리만 솟은 산봉우리가 보이시는지


포카라로 향하는 국내선 비행기의 오른편 창가자리에 앉으면 히말라야 산맥을 볼 수 있다. 날씨가 맑다고 할 순 없었는데, 고맙게도 산봉우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마중 나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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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좌)와는 사뭇 다르게 초록으로 뒤덮인 포카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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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 공항


포카라(पोखरा)는 네팔 중부에 위치하며 카트만두에서 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다. 약 60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네팔 제2의 도시다. 2024년에는 네팔의 관광 수도로 공식 지정되기도 했다. 특히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트레킹을 하기 위해 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이 많다.


관광 도시라 그런가,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택시기사들이 호객을 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는 택시를 타고 공항을 벗어났다. 잠시 후 나타난 흙먼지 날리는 작은 골목엔 뛰노는 아이들이 있었고 차 바로 옆으로는 소가 태평히 걸어 다녔다. 낯설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영락없는 이방인이구나, 그 기꺼운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곧바로 ‘이게 무슨 꼴값이냐’ 싶은 생각에 창피하기도 해서 괜히 운전석 반대 방향으로 눈을 돌렸지만, 어릴 적부터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모습이 창밖에 펼쳐져 더 울컥하기만 했다. 여행자는 이렇게 멋대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현지인들의 당연하기만 한 삶을 대상화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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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384.JPG 택시를 잡아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는 길


포카라에 있는 동안 머물 숙소는 한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윈드폴 게스트하우스'였다. 내가 쓸 방은 3층에 있었는데, 침대가 꽤 넓어 마음에 드는 침실이었다. 침구가 꿉꿉했지만, 그런 건 흠결이 되지 못했다. 어차피 네팔 전역의 공기가 물 머금은 듯 습한 시기였다. 친절한 사장님은 방 안내 뿐만 아니라 근처 한식당과 락시 맛집까지 추천해 주셨다. 방에 혼자 남겨지고 나서 천천히 짐을 풀었다.


락시(Raksi)는 주로 네팔과 티베트 주변 지역에서 소비되는 전통적인 술 음료다. 보통 쌀이나 보리, 밀, 기장을 발효시켜 만든다. 단맛에 더해 구수하고 쓴 맛이 나기도 한다.


‘짐을 푼다’는 행위 때문일까? 물리적인 내 몸은 카트만두 공항에 입국한 순간부터 네팔에 있었지만, 이제야 진정 네팔에 도착했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이전 며칠간 태국에서 입었던 옷가지를 빨아서 방 안에 널고, 천장에 매달린 팬을 돌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K의 메모, 7일간의 A.B.C 트레킹 스케줄


트레킹 전날이라, 바로 3 Sisters Adventure 회사를 찾아가 브리핑을 들어야 했다. 그때 어시스트 가이드 K를 처음 만났다. 브리핑을 시작하자마자 K는 내게 나쁜 소식을 들려주었다. ‘나야풀’이라는 곳이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출발지로 설정하는 마을인데,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그곳에서 올라가는 길이 막혀 버렸다는 것이다.


길이 막혔다고? 그럼 트레킹을 못하는 건가? 아니면, ABC가 아닌 다른 곳을 목적지로 변경해야 하나? 깜짝 놀라 물어보려고 하니, 내가 묻기 전에 K가 재빠르게 설명을 덧붙인다. 나야풀이 아닌, ‘깐데’라는 마을을 시작 지점으로 잡고 올라가자고. K는 그렇게 새로 설정한 7일간의 트레킹 루트를 제안하며 나의 의사를 물었다. 히말라야가 초행인 내가 뭘 알고 결정하겠나, 내비게이터의 계획을 믿고 전적으로 따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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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392_1_mix02.jpg 길 강아지들

미팅이 끝나고 포카라의 명물인 페와 호수로 향했다. 페와는 안나푸르나의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호수다. 같은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던 누군가는 페와 호수가 좋아서 포카라에 몇 달이고 머물고 있다고 했다.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하루가 훅 지나간다고. 확실히 페와는 그런 매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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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포카라’라는 도시명은 네팔어로 호수를 뜻하는 ‘포카리(Pokhari)’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포카라에는 페와 호수(Phewa Lake)를 비롯해 베그나스 호수(Begnas Lake), 루파 호수(Rupa Lake) 등 9개의 담수호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페와 호수 북쪽으로 28km 떨어진 곳에는 안나푸르나 산군이 있다. 맑은 날에는 호수 표면에 히말라야의 산봉우리들이 비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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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에 늘어선 식당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멀지 않은 풀밭에서 물소 무리가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걸 보니 나까지 식욕이 몰려왔다.


포카라에서의 첫 끼를 무엇으로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볶음밥을 시켰다. 입에 꼭 맞는 맛의 볶음밥을 먹고 있으니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혼자 왔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외로움을 느낀 것은 아니다. 단지 이 한 폭의 그림 같은 향기로운 풍경을 내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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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혼자였기 때문에, 밥 냄새를 맡고 왔는지 어느샌가부터 옆에 얼쩡거리던 떠돌이개의 기름진 털, 그를 내쫓던 식당 주인의 단호한 표정, 그리고 묘하게 끈적거리던 메뉴판. 이 모든 것을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지나간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게 이 순간 오감으로 느꼈던 그 모든 것과 감정들은 꽤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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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438.JPG 포카라의 명소 페와 호수. 포카라 시민들도 페와 호수를 사랑하는 듯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옅은 바람이 섞여 뭉근하게 더운 공기가 몸을 감싼다. 한국과 비교해 좀더 높은 습도가 포근했다. 잔잔한 호수를 가만히 감상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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