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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물 같은 현재 Nov 28. 2024

일상이 암을 마주하는 순간

일상이 멈추었다.

“어머니, 아이 혈색이 좋지 않아요.”

일하고 있는데 유치원 선생님이 전화가 왔다.     

“네, 선생님. 동네 소아과를 갔더니 귤을 많이 먹어 그런 거라고 해요. 조금 더 지켜볼게요.”

전화를 끊고 정신없이 일에 빠졌다.     

퇴근 후 아이 얼굴을 제대로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고 후회스럽고 아이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있을까 싶지만 그땐 그랬다. 내 눈앞에 놓인 일 무덤에 사로잡혀있었다.              




아이는 며칠이 지나도 호전이 없었다.

“내가 오전에 휴가 쓰고 다른 병원에 데리고 가볼게.”

남편은 아이와 함께 병원으로 가고, 나는 출근했다. 오후에 있을 행사 준비에 바쁘게 일을 처리하고 점심을 먹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의사가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해서 지금 가는 길이야.”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상사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초초하게 자동차의 핸들을 부여잡고 있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는 어렸을때부터 딱 1번 폐렴으로 입원했던 경험 외에는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했던터라 대학병원 응급실은 나에게 낯선 곳이었다. 주차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도착한 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응급실을 찾았고 또 소아응급실을 찾아 헤맸다. 구급대원과 의료진 틈 사이로 뛰어가며 간신히 눈에 들어온 소아응급실의 자동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의자에 앉아계셨다. 격리된 방의 침대에서 겁에 질린 눈빛과 물에 젖은 솜같이 축 쳐져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그저 괜찮다고만하고 일 무덤에서 허우적 거리는 내 모습이 떠올라 미안함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물은 놀란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알아차리며 고개를 돌려 의료진을 찾아갔다.



출처 pixabay


“혈액 검사 결과 헤모글로빈 수치가 굉장히 낮아요. 이 정도면 걷지도 못할 만큼 어지러웠을 거예요. 지금 당장 중환자실로 입원해야 합니다.”     

중환자실이라니...

다리 힘이 없다고 안아달라고 했긴하지만 생글 생글 웃으며 잘 놀던 아이가 중환자실이라니요.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아이를 회복하는 것 밖에...

중환자실 입원 후 적혈구 수혈이 먼저였다. 수혈할 혈액량에 비해 가느다란 혈관, 점성이 강한 혈액은 아이 혈관을 붓게하고 통증으로 힘들게했다. 그러다 수혈하던 혈액의 사용 시간이 초과되어 폐기하고 새로운 혈액으로 교체해가기를 이어갔다. 




적혈구 수혈을 얼마나 했을까. 아이 컨디션이 조금 돌아온 날 아침이었다. 주사약이 투여된 직후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고, 혈압이 낮아지며 아이 몸에 연결된 기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의료진들의 손이 빨라졌다.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고 나중에 확인한 결과 의료진의 실수로 용법, 용량이 잘 못 투여되는 의료사고였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의료진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으로 더 이상 이 병원에서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설 구급차를 타고 전원한 병원에서 아이 증상의 원인을 찾기 위한 검사를 실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검사만 끝나면 집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나는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검사 당일 오후, 레지던트가 찾아와 병실 밖으로 나를 불러냈다. 아이가 곁에 있는 침대가 아니라 병실 밖으로 불러낼때 큰 일이 생긴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긴장감이 몰아쳤다. 

레지던트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을 떼며 말했다.

“어머니,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입니다.”

“네?”

내가 잘 못 들은 걸까? 꿈인가? TV에서 보던 ‘백혈병’이라는 단어를 내가 지금 듣고 있었다.

“오늘 저녁부터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첫 항암 치료는 한 달 걸리고, 검사 결과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고, 총 치료 기간은 최소 3년입니다.”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멍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병실 안에서 엄마인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임신했을때도 여러 검사들을 거뜬히 통과했고, 아이는 의사가 말한 출산예정일에 딱 맞춰 태어났고 태어난 순간 각종 검사에서도 '정상'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백혈병'을 앓은 가족들은 전무했기에 원인이 무엇인지, 무엇때문에 아이가 병에 걸리게되었는지, 무엇보다 아이는 다시 일상생활을 회복할 수 있는지, 나는 이 낯선 도시에서 언제까지 있어야하는지, 나는 다시 출근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그날 나는 밤이 새도록 다른 환아와 보호자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숨을 죽여 울었다.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앞으로의 미래는 막막했으며, 무엇보다 '왜 하필 나에게', '내가 그렇게 잘 못 살았나?', '내가 얼마나 잘 못 살았길래 내 아이에게...' 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질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타인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자부했던 내가, 정작 내 아이의 고통 앞에서는 이렇게 무력한 것인지... 과연 나는 진정으로 약자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위선자였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찔렀다. 그간의 확신과 신념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듯했고, 이제야 진짜 약자의 심정을 알게 된 것 같아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밀려왔다.




다음날도 밥을 먹는데 눈물이 났다. 병원에 것인지, 무슨 상황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불안에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에게 물었다.

“엄마, 왜 울어?”

 “김치가 맵네.”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무엇때문에 울고 있는지, 너가 어디가 아파 여기에 왔는지, 언제 집에 갈 수 있고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다시 뛰어놀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채 엄마에게 의지하고 있는 아이에게 나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낯선 도시의 병실에서,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 커튼에 가려져 지내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워킹맘의 삶은 멈추었고, 백혈병을 앓는 아이를 둔 엄마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표지 사진 출처 px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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