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똥 냄새
[소똥냄새]
성인이 된 친구들과 차를 타고 간 시골길 여행.
창문을 반쯤 내려 찬바람을 맞음과 동시에 익숙한 냄새가 머리로 들려온다. 소똥 냄새.
친구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이야기하길 “야 돼지냄새냐 이거? 지독하다. 창문 닫아”
누군가에겐 가축의 똥냄새 구별이 무릇 중요하지
않을 터. 냄새를 구분해야 할 의미도 없을 터.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분명 소똥 냄새다.
[소막]
부여에서 나고 자란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한 후 줄곧 소를 키웠다.
내 나이 5살 이후의 첫 기억엔 처음에는 마당에서, 그리고 집 앞 언덕 아래로 이어진 밭에서 소를 키울 막사를 지어 확장해서 10마리에서 20마리 정도까지 늘려갔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쯤엔 학교 가는 루트 중간에 차로 10분 거리에 본격적으로 큰 소막을 지었다. 그때가 소 200마리. 아마 가장 많은 머릿수의 소였을 적이었다. 그 후 고등학교 땐 집에서 뒷산 너머에 소막을 지어 모든 소를 집 가까이 두게 됐다. 어머니의 말로는 너무 멀었던 소막이어서 집 가까이 두고자 옮긴 것이라 했다.
나는 소가 있는 곳, 소를 키우는 소가 자라는 곳이 축사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여느 누군가가 아버지 어디 가셨니?라고 물으면 나의 대답 8할은 ‘소막’ 가셨어요 라고 대답했지만 그중엔 소막이란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도 꽤 있어 그때는 ‘아 축사에 가셨어요’라고 바꿔 말해야 했다.
이래나 저래나 우리 집 소가 크는 곳은 소막이었다.
[소 먹이기]
소를 키우는 집의 아들로서 나의 하교 후 임무는 소의 여물(볏짚)을 먹이는 것이었다. 소는 하루에 두 번 밥을 주는데, 오전에는 사료와 물을, 초저녁에 볏짚과 물을 줘야 했고, 하교 후에 농사일을 마치지 못해 소막으로 아직 발길을 못한 아버지를 대신해 볏짚을 줬다.
어둑해진 소막을 스위치 하나로 곳곳 달아놓은 전구들을 밝히고, 한구석에 쌓아진 볏짚을 시멘트로 된 구수(소의 밥그릇)에 5단씩 준다. 묶인 볏짚단을 뜯어 주기 전에는 구수에 떨어진 소똥(소가 우리 안에서 뛰며 쏟아진 똥들)을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이용해 깨끗이 치워줘야 했는데, 이 일이 가장 고된 일이었다. 볏짚을 다 먹으면 전동 모터를 틀어 나오는 두꺼운 파란호스로 물을 한가득 부어주면 끝난다. 겨울에는 호스가
얼기 십상이라 뜨거운 물을 가져다 부어 녹여줘야 하는데, 이 모든 작업들은 거의 2시간은 족히 갈리는 일이었다.
나의 형제는 3형제이고 위로는 한 살 터울의 큰형, 아래로 9살 아래 막내가 있다. 그렇지만 동생은 어려서, 형은 운동부로 공주의 학교에서 합숙을 했기에 평일 거의 모든 소먹이기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제와하면 나의 몫이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냄새]
소막의 우리 안에는 소똥들로 항상 가득 차 있었다. 소 발목을 훌쩍 넘는 30cm 이상의 똥들이 소가 움직이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매번 소똥을 치우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아버지는 소똥을 농기계 트럭으로 한꺼번에 치우곤 했다. 치워진 소똥은 양이 너무 많아 어느 곳에 처분하거나 판매되진 못했고 소막 끝 한켠에 산처럼 쌓여있었다. 당연히 소똥냄새는 근방 500m 안까지 있는 사람들에게 코끝으로 그 존재를 알렸고, 우리 집 식구는 모두 소똥과 혈투를 벌여야 했다. 소막에 다녀온 아버지의 옷에는 소똥이 묻어 냄새가 고약하게 진동했다. 씻는다고 씻었지만 그 냄새를 다 지우지 못한 경우에는 안방까지 그 냄새를 가져와야 했다. 돌이켜보면, 소똥 냄새는 나의 초중고 생활에서 달고 살았던 냄새였었다.
[Bulls dung house]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놈 두 명이 키득키득 불스덩하우스 불스덩 하우스라고 지나가는 말로 던졌다. 나는 그 의미가 뭔지 몰랐으나 곧바로 그 의미가 영어로 소똥집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 그놈의 멱살을 잡아챘다. 참을성이 또래에 비해 좋았고, 또래 중에서도 힘이 세 싸움을 곧잘 하던 나에게는 도통 놀림받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다른 것도 아닌 소똥 냄새가 나는 소막으로 내 심기를 건드렸기에 나는 험한 욕과 주먹질을 했다. 그 친구는 심지어 우리 소막에도 가끔 놀러 오고 막역하게 지내던 친구였는데 그 배신감이 나를 놀린다는 사실보다 훨씬 커서 더 흥분했었다.
[아들보단 소밥]
아버지는 아들이 굶고 밥을 안 먹어도 소가 굶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는 하루 굶으면 금방 티가 나고 체급에 부정적이어서 절대 굶기면 안되기도 했다. (향후엔 소 사료를 사기 위해 은행에 막대한 빚을 졌다)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아들의 밥은 챙겨주지 않지만 소밥은 꼭 챙기는 소만 생각하는 사람의
이미지기도 했다.
[볏짚 트럭]
소 먹이인 볏짚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가을 추수가 모두 끝나면 이 집 저 집 볏짚을 사고 그 볏짚을 논에서 일일이 한 단 한 단 묶어 트럭에 쌓아
올려 소막으로 가져가 내린다. 어머니는 신여성답게 아버지보다 운전을 먼저 배웠고, 그 때문인지 볏짚을 하는 것은 아버지보단 어머니가 더 많은 일을 감당했다. 나는 학교 근처의 논에서 볏짚을 묶다보면 지나가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것이 어찌나 부끄러웠던지. 내가 초등학교에서 하교할 때는 매 번 어머니가 차로 데리러 왔는데 나의 오로지 관심사는 내가 집에 타고 갈 하교 차량이 볏짚이 실려있는 차량이냐, 안 실린 지프트럭이냐(그 당시에는 중고 지프차와 1톤 트럭 이렇게 두 대였다)였다. 어느 날 나무를 하고 트럭에 싣고 학교 정문에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볼 때면 쥐구멍에 숨고 싶었기에 그래도 볏짚실은 트럭은 그나마 나았던 것 같다.
나의 초등학교 여느 생일 에는 친구들 5-6명을 동원해
기회를 잡아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해먹이고 트럭의 볏짚 운반에 강제 노역으로 동원했던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귀여운 일화이지만, 참 생일에 별 걸 다 했다 싶다.
[5마리]
이제 우리 집 소는 다섯 마리다.
정말 무수한 소들이 우리 집에서 나고 자라 팔리고 또 추위에 죽기도 했다. 우리 집 식구도 이제 다섯이었지만, 셀 수 없는 가족들이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다.
소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