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_더울 땐 언덕 오르기, 애들레이드 힐

개척자 여성들의 길/ Pioneer Women's Trail

by 경쾌늘보


핫한 날엔 핫한 업힐


햇살이 43도를 찍는 2월, 달씨는 짧은 시간 안에 큰 효과를 얻는 묘책을 실행한다. 바로 언덕 오르기다. 언덕주, 경사주, 또는 업힐 드릴이라고도 불리는 이 훈련은 여름 이른 아침, 비교적 시원할 때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달씨가 언덕 오르기의 효과를 깨달은 것은 순전히 체득한 경험에서였다. 평소 같은 코스를 반복하며 달리는 것이 싫증 나면, 가끔 변화를 주기 위해 산이나 언덕을 올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경사 코스를 오르고 난 후에는 달리기가 한결 덜 힘들게 느껴지고, 몸의 힘도 더 탄력 있게 느껴졌다.



언덕 오르기가 주는 것들


전문가들도 언덕훈련의 장점을 강조한다. 우선 자세교정에 큰 도움이 된다. 오르면서 상체가 경사에 맞춰 살짝 앞으로 기울고, 발은 뒤꿈치가 아닌 중간, 즉 미드풋(midfoot) 착지가 된다. 자연스럽게 미드풋 달리기를 연습할 수 있다. 또한 코어 근육, 대둔근, 햄스트링 등 큰 근육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정강이 통증이나 무릎 부상 위험이 낮고, 단거리 달리기에도 필요한 근육을 강화하여 속도 향상과 러닝 이코노미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된다.


훈련 후 달씨가 느끼는 즐거움도 있다. 다음 날 온몸의 근육이 뻐근하게 느껴질 때면, 왠지 근육이 500g쯤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흐뭇해진다.



애들레이드 힐, 여성 개척자들의 길


여름 남호주의 들판은 한국의 가을 황금벌판과 달리, 뜨거운 태양 아래 잔디가 바싹 말라 누렇게 변해 있다. 그런 풍경 속에서 달씨는 이른 아침 Pioneer Women's Trail, ‘개척자 여성들의 길’을 오른다.

이 길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 달씨는 경외심이 더해졌다.


# 애들레이드 힐, Pioneer Women’s Trail
1838년, 프러시아에서 종교 박해를 피해 온 난민들이 애들레이드 동쪽 언덕 지역에 정착했다.

여자들은 척박한 땅에서 수확한 농작물과 낙농 제품을 등에 지고, 밤 12시 애들레이드 시장을 향해 출발했다. 35km를 걸어 물건들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는 벽돌 2장을 사서 돌아왔다. 그렇게 모은 벽돌로 Handorf Church와 마을들이 지어졌다.

그들이 20년간 다닌 그 길을 기념하기 위해 1980년 이 트레일의 이름이 지어졌다.


매년 5월 경에는 코스 걷기 행사가 있다. 달씨는 트레일 전체를 완주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기회 될 때마다 구간구간 멋진 길을 오르며, 약 190년 전 파이어니어들의 고생과 용기를 상상해 본다. 한국 역사에도 이들보다 약 300년 앞서, 1592년에 고양 행주에서 권율 장군과 부대가 왜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할 때 치마를 잘라 허리에 묶고 돌을 담아 날라 싸웠던 여성들도 떠올렸다.


자신은 생존을 위해 35km를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언덕을 오르며 작지만 의미 있는 성취를 느껴본다. 그 낯선 땅의 이민 개척자들이 직면했을 외로움과 어려움을 생각하니 마음이 찡하다며.



어제 보다는 나은 자신


'언덕, 오늘 멋지게 올라주마' 하며 시작하지만 곧 헉헉거리며 멈추는 달씨. 늘 마주하는 것은 생각보다 잘 멈추는 자신이다. 그럴 때면 자신에게 실망감이 오기도 하지만 경사를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을 쓴다고 스스로 안도할 수밖에. 언덕훈련에는 다른 속도로 오르내리는 반복 훈련 (uphill repeats)도 있다는데, 달씨는 이 여름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가끔 같은 길에 산악 러너들이나 산악자전거팀이 유유히 그녀를 앞질러 갈 때 주눅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러너는 다른 사람이 아닌 '어제의 나, 예전의 나'와 경쟁한다고 하면, 전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어쨌든 더 도전하고 있는 ‘오늘의 달씨’가 있다.


"In long-distance running, the only opponent you have to beat is yourself, the way you used to be."
무라카미 하루키


언덕 훈련하기 딱 좋쥬?





파이오니아 우먼스 트레일
애들레이드로 가는 길



러너스 페이스에도 불구하고


달씨는 땀을 닦으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온다. 꼬질꼬질 땀 냄새와 햇볕에 그을린 잔디 같은 얼굴도 함께. 이러다 운동해서 나이보다 더 늙어보인다는 러너스 페이스 (Runner's face)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실내에서 우아하게 할 수 있는 운동들을 두고 자외선도 쎈 호주에서 달씨가 굳이 야외의 트레일을 가는 이유는 무얼까? 실내에서는 얻을 수 없는 햇살과 바람이며 비슷한 것 같지만 미세하게 변하고 있는 계절의 숨결을 알아가는 즐거움 때문이겠다.

선크림, 모자, 선글라스 단단히 챙겨서 밖으로!


runner’s face 뜨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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