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_골든 선셋 도시, 애들레이드

석정, 그리고 다시 남반구

by 경쾌늘보


마지막은 늘 슬프다.


"예전처럼 많이 춥지 않네." 12월과 1월 겨울 한국에서 한두 달 지내보니 달씨는 새삼 느꼈다. 물론 호주의 허술한 난방시설을 생각하면 너무 훌륭한 한국의 온돌과 난방 덕분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뭐 하나라도 챙겨주고 좋은 곳이라도 데려가고 싶어 하는 가족들, 친구들과 마음이 따듯한 시간만을 누렸으니.


이제 저 먼 남반구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저녁 비행기라 낮시간에 달씨는 가족들과 산책을 제안했다. 다행히 날씨가 도와줬다. 좀처럼 걷기 싫어하시는 달씨의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걷자고 모시고 나섰다.

동네에 새로 생긴 예쁜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소확행도 놓칠 수 없지.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들 위로 곧 봄이 올 것 같은 파란 하늘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겨울 동안 집안에만 있던 힘없는 다리를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처음에만 어려웠지 동력이 붙은 듯 발걸음이 가벼워지심을 느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또 언제 같이 걸을까 달씨 마음은 아쉽다. 노년들이 혼자 걷기가 엄두가 안 날 때 함께 걸어 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가족과 함께 걷고, 차 마시는 소소함이 이렇게 특별한 일이 될 줄 모르고 시작한 여정을 다시 가야 했다.


헤어짐, 부모님 마음을 또 한 번 휘젓는 것 같아 죄송하고 각자 그리워하고 허전해할 시간들을 생각하면 달씨는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손녀를 꼬옥 끌어안아 주시고, 배웅 나온 가족들과도 포옹을 하며 아이들은 말했다.

"곧 또 올게요. 건강하세요!". 울컥하는 감정들을 삼키며 겨우 말을 하지만 공항 가는 차 안에서 모두 눈물로 가득했다.


마지막 산책


중간지대에서


달씨 가족은 말없이 캄캄한 밤하늘을 날아 시드니에도착했다. 서울에서 애들레이드까지 가는 길은 직항이 없기에 달씨 가족은 시드니로 경유하는 코스. 도착한 날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Australia Day'. 씨티에 행사가 많을 것이고 경유 시간이 길어 본다이 비치 바닷가에 나갔다 올 계획이었다.


매년 1월 26일, Australia Day는 1788년 영국에서 죄수들과 관리인, 가족들을 실은 약 1400명을 태운 11척의 범선이 처음 이 거대한 대륙에 시드니 항구 쪽에 도착한 날을 기념해 왔다. 동시에 원주민 입장에서는 침공의 날 (Invasion Day)로 보고 반대 시위를 한다. 어느 쪽은 도시에서 시위대에 참여를 하고, 어느 쪽은 바닷가에서 바비큐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호주의 날' 기념 마라톤을 하기도 한다.


공항 밖으로 나서니 쨍한 햇살과 더운 열기가 쏟아진다. 나가고픈 기운이 말라버렸다. 겨울에서 온 달씨 가족은 대신 에어컨 시원한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뜨거운 햇살 내리쬐는 공항 시드니 유리창에 앉아 한국에서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았다.


시드니 공항에서 대기 중

중간에 있다.

시드니, 공간의 중간. 태어나 자란 곳과 살고 있는 곳사이.

중년, 시간의 중간. 몸도 청년과 노년의 중간 어디쯤.

중간쯤 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민 15년 차도 한국과 호주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몸이 나이듦에 따라 감정도 늙을것 같지만, 감정의 노화는 신체보다 더디기에 삶의 기쁨, 슬픔, 애석함은 무뎌지지 않고 선명하다.


감정과 생각들을 머릿속으로 매만지다 보니 비행기가 큰 소리를 내며 애들레이드 땅에 도착했다. 밖은 반쯤 타버린 잔디로 누런 색, 따끈하게 달구어진 애들레이드로 왔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같은 날, 초록 시드니 누런 애들레이드 잔디



다시 왼발 오른발


두어 달 만에 강아지와 재회한 달씨는 선물처럼 산책에 나섰다. 익숙하던 길도, 사랑하던 나무들도 낯설게 느껴졌다. 한 가지 그대로인 것은 골든 빛깔의 석양. 매일 다른 색과 빛으로 감동을 안겨주는 저녁 하늘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유독 애들레이드의 노을이 예뻐 보이는 이유는 높은 건물이 적어 하늘이 가깝게 보이기 때문이다. 달씨는 가장 충직한 달리기 동반자를 향해 구호를 외쳤다.

"가보자 왼발 오른발, 다시."


동네로 돌아왔다.
golden sunset
충직한 달리기 동반자



곧바로 1월 말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날은 37도였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가 오가는 구정 신년이 왔다.


새해 큰 복을 바랄 것 없다. 작은 일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 아직 있다면 열정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건강히 달릴 수 있는 것이 이어지면 하는 달씨는 소망해본다. 새로운 코스로의 도전도 함께.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의 한 문구가 떠올랐다.

'겨울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 삶의 봄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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