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마라톤 출발지 & 우라야스와 신주쿠
드라이기 더위
언젠가 호주 여름의 절정에 놀러 온 달씨의 친구는 그 더위를 “드라이기 바람을 살에 직접 대고 있는 느낌이야”라고 했다. 미용사가 실수로 드라이기를 한 곳에 대고 있을 때의 아찔함 같은 온도. 한국의 습한 찜통더위와 달리, 남호주 12월의 태양은 건조한 열기로 온몸을 감싼다. 적도 쪽 다윈이나 케언즈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남쪽은 확실히 ‘오븐’이다.
이런 한낮 40도 더위에 달리는 사람이 있을까 의아했지만, 역시 ‘무모한’ 러너들은 어디서나 있다. 12월, 졸업과 방학, 휴가가 겹쳐 대회는 많지 않지만, 달리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 어디나 구실을 만든다. 남호주 빅터 하버에서는 12월 초 마라톤이 열리고, 연말에는 크리스마스 달리기 이벤트도 곳곳에서 열린다.
지난해 달씨도 연말 달리기에 참여했지만, 올해는 다른 계획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원한 곳으로!
가자, 겨울 왕국으로
호주에서 태어나 사는 사람들에는 평생 눈(snow)을못본 이들도 많다. 달씨의 딸도 처음으로 눈을 본 것이 9살 때였다. 한국 겨울에 갔을 때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쌓이는 눈을 처음 본 그때, 아이의 기쁨과 신기함이 드러나는 순백한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달씨는 기회가 된다면 눈 오는 계절에 북반구로 여행 갈 계획을 호시탐탐 기다렸고 마침내'지금'이라는 선물을 잡기로 했다.
일부 호주인들은 연휴가 긴 12월이면 사포로 같은 일본 북부지역에 스키나 보딩을 타러 가기도 한다. 달씨 가족은 사포로가 아닌 도쿄로 가기로 했다. 눈구경을 위해서라기 보단 가족여행으로 디즈니랜드와 도쿄 곳곳을 둘러보기 위해.
아무튼, 도착
떠나기 하루 전, 그것도 오후에서야 아들의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집안은 패닉상태. 하늘의 도우심과 달씨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닌 끝에 간신히 출발은 할 수 있었다.
'나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이었어?' 생각이 드는 순간들.
"내가 평소에 달리기를 했으니 이 정도로 달려 비행기 탈 수 있었던 거다." 가족들에게 으스대고 싶었으나 이미 기절한 듯 뻗어버렸다.
"웰컴 투 재팬"
기내 방송 소리에 눈을 뜨니 더운 나라 남반구에서 추운 나라 북반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천운은 거기까지였는가. 겨울 옷이 든 짐은 오지 않은 사고가 그들을 기다렸고, 그리하여 달씨 가족은 여름옷만 딸랑 입고 공항 밖으로 나가 찬바람 싸대기로 격한 환영을 받아야 했다. 어떤 드라마 보다 더한 소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마디는 할 수 있었다.
"아무튼, 도쿄 도착".
디즈니랜드에 레깅스
짐은 아직 호주에 있고, 24시간 더 걸린다 했다. 다음 날 예약한 디즈니랜드, 입구에서부터 놀이공원 패션이 패딩과 롱코트, 루즈핏 바지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쿄나 서울이나 패션 트렌드에 민감한 곳. 달씨는 비행기에서부터 입은 쫙 달라붙는 러닝 레깅스 차림. 듣도보도 못한 레깅스에 얇은 옷차림, 그날만큼은 디즈니 캐릭터보다 더 눈에 띄는 존재가 된 듯했다. 민망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어찌하랴 러너다!
일본 골목런
다음 날 짐이 도착하고, 달씨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동네 달리기였다. 이는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현상으로, 새로운 곳이면 꼭 한번 달려보고자 하는 일종의 의례 같은 것이다. 그녀는 마이하마 동네의 보통의 골목길들을 탐험했다. 좌측통행 방향이 호주와 같아서 어색하지 않았고, 주택가 골목에 쓰레기가 없이 깨끗한 것도 눈에 들어왔다. 도로 바닥의 표시들이 낯선 곳에서 달리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등교하는 동네 아이들의 뒷모습이 귀여워 학교로 가는 길에 달씨는 이곳에서도 열심히 달리는 중년들을바라보았다. 화려하고 북적이는 도시 중심이 아닌, 서민들의 삶이 보이는 보통의 골목을 달리는 일은 언제나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달씨 일본어 실력
달씨는 일본 출발 3달 전 일본어 수업을 듣기 시작했었다. 일본에 가서 조금이나마 편한 의사소통을 하고 싶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언젠가' 할 수도 있는도쿄 마라톤을 위해서라는 것은 혼자 마음속에 두었다. 그렇게 3개월 빠지지 않고 수업 들으며 나름 준비한 일본어는 입에서 맴돌기만 했으며,
결국 도쿄에서 써먹은 문장은 딱 한 개.
“トイレはどこですか?”
토이레와 도코 데쓰카?
화장실이 어디냐고. 급하다고!
도쿄 마라톤
그래, 일본어는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급한 대로 번역기를 돌리며 다니던 달씨 가족. 그 와중에 달씨는 야경을 무료로 볼 수 있는 곳에 가자고 가족들을 데려간 곳은 도쿄 메트로폴리탄 정부청사였다. 사실이곳은 도쿄 마라톤 출발지이기도 하다. 달씨는 일본 오기 전에도 도쿄의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는데 도쿄 마라톤 코스를 찾아보던 것이었다.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가는지 마라톤 코스맵을 따라가다 보면 도쿄의 주요 명소 포인트도 알 수 있다. 어느 도시이든 가장 자랑하고픈 코스를 국제 마라톤 코스로 만들기 때문이다.
#도쿄 마라톤
매년 3월에 초에 열리는 도쿄 마라톤은 세계 7대 메이저 마라톤 중 유일하게 아시아에 있는 대회이다. 3만 5천 명 이상이 참가하며, 일반인은 추첨을 통해 당첨된 사람들만 참가할 수 있다.
신청은 매년 8월 중순 (주로 8월 15일)에 시작하여 2주간 하며, 결과는 한 달 뒤인 9월 중순에 발표한다.
퀄리파잉 타임을 보유한 참가자들은 일반 참가자보다 우선적으로 추첨에 포함된다.
갖가지 코스튬을 입고 달리는 마라토너들과 풍성한 간식제공이 많은 대회로도 유명하다.
피니쉬 라인은 도쿄역 앞 광장이다. 복잡한 도쿄역을 지나가면 달씨는 피니쉬 라인도 익힌다. 추첨이 되어야 달릴 수 있고, 체력과 실력이 되어야 하는 마라톤 대회를 자꾸 노리는 달씨. 아직 첫 마라톤 완주의 도취에서 못 헤어나고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주쿠 공원까지 달리기
12월의 한국 날씨쯤 되려나 했던 도쿄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노란 은행잎들이 여전히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낮 기온은 10도 초반, 다시 말해 달리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시간이 많지않은 관광객이라면 찾지 않을 신주쿠 공원, 달씨는 그곳까지 달려갈 계획이었다. 결승점으로 정한 곳은 신주쿠 공원 안에 있는, 전망 좋고 조용한 스타벅스였다. 가족들에게 운동화를 신게 하고 함께 달려가보기로 했다. 은행나무 가득한 고요한 아침의 주택가를 지나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더 크고 짙은 은행나무들이 기다렸다.
조금 숨 가쁘게 도착한 공원은 아직 한가했다. 그런데 스타벅스는 공원 안,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교통카드로 결제 가능하지만, 달씨 가족 같은 외국인들은 당연히 카드가 없고, 다행히 조금 남은 현금으로 번거롭게 표를 사서 입장을 했다.
스타벅스 자체는 특별할 것 없었지만, 온 가족이 함께 낯선 도시의 아침을 달려 땀 흘리고, 길을 못 찾아티격태격 웃으며, 도넛과 음료를 즐긴 그날 아침. 달씨는 그 땀방울처럼 추억도 방울방울 어딘가 매달려있기를 바랐다.
눈덮인 후지산을 보긴 하였으나
매섭지 않은 도쿄의 겨울, 그렇다면 제대로 매운맛보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