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레이드 산타 코스
남반구의 봄은?
시드니 마라톤 어느 해에 참가할까, 행복한 고민은 좀 더 가지고 있기로 하자.
첫 마라톤을 마친 지 두 달이 되어갔다. 발 부상으로 쉬던 몸을 이제 밖으로 데려가 본다.
한국의 11월은 추위가 시작하고 첫눈이 내리지만, 남반구의 11월은 꽃눈이 내린다.
남반구의 봄은 언제부터일까?
일 년을 사계절로 나누면 당연히 9월부터가 봄이겠지만, 이곳 남반구, 호주의 봄은 그보다 일찍 온다. 8월 중순 공기는 차갑지만, 그 틈으로 봄꽃은 피어난다. 그렇게 무르익은 봄의 자태는 11월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름에 가깝지만 아직은 봄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11월.
크리스마스 페전트
11월은 그와 동시에 다음 달 12월 크리스마스를 위한 준비와 행사들도 무르익는다. 열한 번째 달 애들레이드의 첫 번째 행사는 어린아이들과 가족들이 내내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페전트 (Christmas Pegeant)!
크리스마스 페전트는 크리스마스 테마의 퍼레이드이다. 다른 대도시 같은 관광시설이 없는 애들레이드에서는 대형 지역행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호주 내에서도 가장 큰 크리스마스 퍼레이드라고 한다. 매년 11월 초 토요일, 도시 한가운데서 교통통제 하에 이뤄진다.
보통 퍼레이드는 아침 9시 반부터 시작하지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먼저인 새벽부터도심 구석구석 명당자리에 앉아 있어야 잘 볼 수 있다. 3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거리에 자리 잡는다. 2백만 명이 조금 넘는 도시에서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고 보면 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럴 때는 이곳 사람들도 가족, 친구, 친척 찬스를 다 동원하여 자리를 맡는다. 캠핑용 같은 야외 의자, 기다리는 동안 먹을 간식이 든 아이스백, 돗자리 등 깔고 축제를 기다리는 들뜬 마음으로 기다린다. 11월에 애들레이드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크리스마스 페전트를 놓치면 아까울 것 같다.
달씨는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페전트를 기다리던 시절에 교통통제와 주차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리 잡아 보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갔을 때 놀라운 것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퍼레이드가 시작하기 전 통제된 도로 바닥이 아이들의 공식 낙서장이 되고 아이들은 길바닥 예술가가 된다. 가져온 분필로 바닥 어느 곳에든, 어떤 그림이든 그리며 놀았다. 도시 바닥이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캔버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자체가 색다르고 신나 보였다. 그 다음 해부터 달씨도 분필을 꼬박 챙겨갔다지.
퍼레이드가 시작하고 팀별로 지나가며 온갖 코스튬을 입은 행렬들이 사탕을 뿌린다. 아이들은 그날 줍는 사탕만으로도 이미 행복감에 젖어드는 날이다.
흥분과 함성
달씨의 아이들은 이제 크리스마스 페전트에 큰 흥미가 없을 만큼 커버렸다. 혼자 가기는 뻘쭘한 러너는 그래도 멀리서나마 흥분의 공기를 느낄까 하여 도시로 달려가 보았다.
역시나 빼곡한 사람들과 흥분의 함성들 그리고 즐거운 미소들이 11월 햇살만큼이나 들떠있다. 크리스마스 페전트가 열린 24년 11월 4일은 바로 뉴욕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러너 달씨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관중들과 함성 그리고 이 길이 애들레이드 마라톤이라면 어떨까? 같은 날 열리는 뉴욕 마라톤은 42.195Km 구간 내내 시민 응원단의 함성으로 가득하다지. 크리스마스 행렬을 위한 교통통제는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마라톤을 위한 교통통제는 아직도 불편함 자체인 것이 현실이긴 하다.
애들레이드 산타 코스
무리에서 한발 떨어져 달씨는 다른 루트를 선택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산타 코스(The Santa Course)’. 애들레이드 런들몰, 도서관, 미술관, 보태닉 가든, 동물원 등 도심의 주요 인기 명소들을 이은 길로, 포인트마다 대형 산타 할아버지 풍선이 서있다.
달씨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도서관 앞을 지나고 조용하고 한적한 보태닉 가든으로 들어갔다.
도심 속 평온 한 조각, 보태닉 가든. 곧 여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11월의 애들레이드 보태닉 가든은 처음 보는 이벤트로 꾸며져 있었다. 미국 아티스트 치훌리 (Chihuly) 작품이 곳곳에 선보였다. 나무와 식물들로 가득했던 공간에 예술가의 터치가 조합된 것도 이 도시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도시가 변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가든 한편에 왕관을 쓴 여인의 동상이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은 그녀, 애들레이드의 이름에서 따왔다. 애들레이드 왕비는 독일 공주로 영국 국왕 윌리엄 4세의 아내가 되었고, 윌리엄 왕이 호주에 식민지를 세우며 왕비의 이름을 붙였다. 월리엄 4세 왕은 왕비와 결혼하기 전 사실혼 관계가 아닌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애들레이드 왕비가 그 자녀들을 다 키우고 교육시켰다는 스토리도 그 작은 동판에 적혀있다. 왜 스토리를 그 동판에 새겼을까 달씨는 궁금하며 보태닉 가든을 빠져나왔다.
다음 길을 향해
후문으로 빠져나가 동물원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큰 나무들 뒤에서 숨바꼭질했던 아이들의 옛 모습도 떠오르는 길이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만든 터널을 달려보니 매번 걷기만 했을 때와 다른 기분이었다. ‘달리기에도 이만한 길이 또 있을까!’
크리스마스 페전트로 들썩들썩한 도심 한복판 옆에서 자신만의 평화로운 달리기를 하고 있는 달씨. 달리기에 키 큰 나무 그늘만큼 완벽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길로 곧장 가보고픈 마음이었다. 시간이 꽃잎들을 떨어뜨리기 전에. 마치 꿈처럼 온 세상이 보랏빛으로 물든 거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