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의 다이어리
‘내년 다이어리를 준비할 시간입니다.’
이제 막 2024년 11월로 접어들었다. 달씨는 다이어리를 펼쳤다. 내년 다이어리 살 시간이라는 간지의 문구를 보니, 상업성 멘트이지만 한편으로 ‘벌써 한 해가 다 갔나?’ 싶다. 하지만 곧 내년 마라톤을 준비하라는 신호처럼 느껴져 러너의 마음이 바빠진다.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서 달씨는 여전히 종이 다이어리를 좋아한다. 다이어리에 감정을 끄적이기도 하고, 한 일과 할 일들을 메모하고, 급하면 껌 뱉는 용도나 쇼핑리스트를 쓰기 위해 찢어 쓰기도 한다. 1년간 함께 할 다이어리. 매해 연말에 다이어리를 구경하고 선택하는 것은 그녀에게 하나의 경건한 의식이자 가슴 뛰는 연례행사이다.
러너가 된 후 확연히 달라진 점은, 새해 다이어리 일년 계획에 마라톤 일정들부터 채운다는 것이다. 호주 주요 도시 마라톤, 할 수 있는 지역 마라톤, 그리고 구경이라도 하고픈 세계 마라톤. 달씨의 다이어리는 마라톤 날짜들로 빼곡해진다. 달씨는 중얼거린다. “이게 바로 마라톤의 시작이지.” 그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러너의 태도라며 형광펜까지 들고 날짜에 힘주어 표시하는 달씨.
예전 직장인 시절에는 연중 주요 업무와 행사들을 긴장감으로 채웠다. 호주에 살고부터는 가족과 친구들 생일이나 학교 주요 행사들로 채웠던 일 년 계획표, 이제 마라톤 일정으로 바뀐 것을 보니 달리기가 그녀를 바꿔도 한참 바꾸었다.
달씨가 지난 2024년 9월, 인생 첫 풀코스 마라톤을 한지 두어 달이 지났다. 아직도 마라톤 완주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하다. 그녀가 참가했던 첫 마라톤인 시드니 마라톤이 3년간의 후보지 심사를 거쳐 드디어 ‘세계 7대 메이저 마라톤’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 소식은 다른 말로 하면, 후보지 심사 기간 중 풀코스를 완주한 마라토너들에게는 향후 3년 중 1번 출전을 확정해 주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달씨는 세계 7대 마라톤 중 하나를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세상에! 느림보 동네 꼴찌에게 이 무슨 일이! 얼마 후 시드니 마라톤에서 이메일이 왔다. 향후 3년 중 어느 해에 참가하겠냐는 의향을 물었다. 25년/ 26년/ 27년 중 택하시오. 행복한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