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사이드 골목 길
보라 선입견
그 옛날 히트곡 가사처럼 보랏빛이 살며시 다가올 수 있을까? 적어도 한국에 살 때만 해도 일반적으로 보라색은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지는 색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신비로움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색한 거리감을 안겨주는 탓에 쉽게 호불호를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름날 활짝 핀 수국의 오묘한 보랏빛깔에 호감이 가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 콕 집어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멀찌기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던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나무가 있었다. 엄마가 되기 전 20대 후반에, 혼자 시드니를 거닐 때였다. 시청 근처에서 태어나 처음 보는 나무와 마주쳤다. 길을 가다 말고 멈춰 서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아름다운 색에 압도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국적이고 매혹적이었다. 굵고 짙은 줄기 끝에 알알이 박혀 하늘을 온통 보라색으로 수놓는 이 나무는 대체 뭘까? 그때는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궁금증만 남긴 채 스쳐 지나간 만남처럼.
비포 크리스마스 (Before Christmas)
나중에 호주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 나무 이름은 바로 자카란다(Jacaranda)라고 한다. 자카란다 나무를 알게 된 후, 달씨의 세상은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름을 알려준 할머니는 한 가지 더 알려주었다.
"이 나무의 또 다른 이름은 '비포 크리스마스(Before Christmas)'야. 크리스마스 전까지 피어있어 거리를 보랏빛으로 물들여주지."
'비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빨간색만 떠올랐는데 보라색과 크리스마스라니! 호주에서는 자카란다가 기후에 따라 10월 말부터 개화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거리 곳곳에 자카란다를 가로수로 심어놓은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쏟아지는 보랏빛 아래를 걷다 보면 달씨의 감각으로 호주의 봄은 온통 보라색이 되어 있었다.
자카란다뿐 아니라 등나무(위스테리아), 아프리카 백합이라 불리는 아가판서스, 라벤더, 팬지, 베로니카, 인디고페라, 심지어 콩꽃까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보랏빛 꽃들이 있었던가. 한때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정쩡했던 보라색이 어느새 일상 여기저기에서 살며시 다가왔다. 누가 좋아하는 색을 물으면 '보라도 좋아!' 라고 할 만큼.
일년에 한번, 보랏빛 러닝
이 풍경을 만끽하기 위해 달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일 년에 딱 한 번 누릴 수 있는 이 보랏빛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달씨는 신발 끈을 묶고 집을 나선다. '자카란다야, 크리스마스까지 꼭 버티어줘.' 속삭이며 마치 자신에게만 있는 길인 듯 보라꽃잎이 눈처럼 떨어진 골목길을 달린다.
건조한 여름 공기 때문에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 떨어진 보라 조각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온통 보라 카펫이 깔린 길을 달리며 그녀는 황홀감을 느꼈다. 제 발로 왔지만 늘 떠나고 싶었던 도시, 애들레이드. 왠지 모르게 닫힌 마음 때문에 어디든 다른 도시로 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도시의 나무와 꽃들이 달리는 달씨에게 보랏빛 위로를 건네고 있다.
이 멋진 길을 달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인파도 없었다. 종종 동네 사람들이 강아지 산책을 할 뿐. 달씨 홀로 달릴 수 있는 길이었다. 달리기를 하며 흘리는 땀과 함께 불만도 녹아 땅에 흩어진다. 계절 끝의 꽃들처럼 불안감도 사그라진다.
'관광 러너'라고도 할까. 혼자만의 달리기 길과 보라색 흥분에 취해 멋지게 계속 내달릴 것 같지만, 곧장 숨이 차 멈추는 것이 달씨의 현실이기도 했다. 느린 달리기를 더 멈추게 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풍경을 찍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녀는 멈추지 않고 달린다. 신이 선물해 준 듯한 보라 카펫 위를.
수고했어!
자카란다 보라처럼 달리기도 짙어지길 바라며,
일 년을 다시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달려본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죠~.'
온도가 올라가고 보라꽃이 떨어진다.
남반구의 뜨거운 공기와 함께 학교들은 긴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크리스마스가 찾아 오면
또 한해가 저문다.
수고한 자신을 위한 달리기.
달씨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올해도 수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