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 설중런!
추위를 싫어한 펭귄
제목 때문이었다. <한국이 싫어서>.
달씨는 오랫동안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마치 외국으로 떠난 이들이 모두 한국이 싫어서 떠난 것처럼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동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야 읽어 보았다. 한 청년이 안정된 직장을 뒤로하고 호주로 건너가 정착을 시도하는 이야기이다.
과연 호주에 사는 한국인들이 모두 한국이 싫어서 온 걸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달씨의 경우는 분명했다.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추위가 싫어서'였다.
소설 속에도 나오는 동화,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추위를 싫어한 펭귄> 속 주인공 파블로. 얼음물속을 헤엄치거나 미끄럼을 타는 게 도무지 맞지 않았던 펭귄. 그는 이글루 안에 불을 지피며 장갑과 목도리를 잔뜩 두르고는 선글라스를 끼고, 따뜻한 햇살을 꿈꾼다. 결국 갖은 시도 끝에 뗏목을 타고 남쪽으로 떠났다. 환경에 순응하지 말고 떠나 라는 메시지보다는 따듯한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며 어린 시절의 달씨도 그런 꿈을 꾸곤 했다. 파블로를 응원했다.
동화는 파블로가 천국인양 행복해하며 끝나지만 그렇다고 파블로가 늘 행복했을까? 아마도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웠을 것이다. 달씨도 한국이 싫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늘 한국행은 우선순위였다. 다만, 손끝 발끝을 얼려버리는 한국 겨울의 추위가 여전히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한국에 도착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가족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 땅, 공항에 도착하며 말했다.
"칼바람 맞은 준비 됐나?"
영하에서 달리기
그녀는 달리기를 시작하고 sns에서 한국의 영하 15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았다.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남호주 애들레이드에서도 겨울 추위는 나가기 싫은데, 마이너스 온도에서 달린다는 것이 가능할까 내심 궁금했다. 자신이 얼마큼 변해있는지실험해 보고 싶었다. (달씨 아직 젊군.)
한국의 겨울에 온 것은 오랜만이기도 하고 더구나 달리기를 시작한 후의 첫 한국 겨울이었다. 달씨의 한국 일정은 꽤나 바쁘고도 알차게 돌아갔지만 가는곳마다 달리기를 시도해 보았다. 반팔 반바지 입고 달리시는 할아버지에 허걱 놀란 부산 해운대에서 달리기, 옛 동네 송파길, 새로운 동네 위례길 등등. 그때까지 눈이 안 왔기에.
설중런, 눈 오는 날 달리기
드디어 1월의 매세운 한파가 오고 눈까지 내렸다. 순식간에 세상을 덮은 눈. 달씨에게 눈은 그리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추위와 불편, 그리고 녹은 뒤 남는 질퍽한 거리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에 없던 느낌이 들었다. 작은 모습들은 다 덮고 큰 실루엣만 남기는 하얀 매직처럼 보였다. 자질구레한 것들은 다 덮이고 감춰진다. 때론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말라는 것처럼. 큼직한 하얀 덩어리들만 있을 뿐이었다.
달리기 방한용품을 장만하러 달씨는 애들레이드에는 없는 데카쓰론에 들렀다. 제품들도 다양해서 놀랐지만 착한 가격에 또 놀랐다. 장갑, 모자, 양말 등 겨울 용품들을 담았다.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
눈 내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달려?
덕수궁 근처에 머물던 달씨는 어그부츠처럼 안에 털이 있는 신발이 아니면 못 견디던 겨울이었지만 이제 러닝화에 양말로 겨울을 대할 수 있었다. 눈이 쌓이는 풍경과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접한 것이 처음인 양 신기하고 즐거웠다. 이 기분이면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덕수궁 돌담길을 향해 나서자마자 3분도 안되어 너무나 큰 오산이라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출근길 종종걸음을 보며 ‘나도 저랬지’ 하고 웃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얼음 위에서 “어 어~” 하다 꽈당! 하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이~ 어떻게 길에서 넘어져.' 생각했지만, 달씨도 몇 걸음 안 되어 실화가 될 수도 있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덕수궁과 돌담길은 여전히 조용히 있었다. 그러나 24년 12월에 일어난 비상계엄 사건으로 돌담길은 경찰차로 둘러싸여 있었다. 미국대사관 앞은 삼엄한 경계, 그 앞을 유유히 프로페셔널한 러너처럼 달려 지나가고 싶었으나 그 얕은 오르막도 벌벌 기었다. 그 경찰차 내 대기조들에게 큰 볼거리가 아니었을까싶다. 실상은 두 다리로만은 도저히 미끄러워 돌담길을 한 팔로 짚고 가야 하는 흑역사를 만들었다고나 할까.
내리막은 더 문제였다. 넘어지는 불상사에 대항하기위해 온 신경과 근육을 써야 했다. '이럴 때 나이탓 하는 건가?' 한국까지 와서 아까운 시간을 부상으로 널브러져 있을 수는 없으니 달리기는 스톱. 3Km에서 마무리하고 달씨는 겨우 겨우 걸어서 방으로 돌아갔다.
설중런, 다음에 만나자
헌국 겨울에 마구 달린다고?
눈을 사뿐히 즈려밟고?
게다가 남극에서 달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새삼 영하의 눈길 위를 달리는 러너들이 몸과 정신 상태가 존경스러웠다. 설중런을 하기에 달씨의 달리기는 아직 설익었다. 하지만 언젠가, 눈 위에 자신 있는 자세로 뛰는 발자국을 남길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