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드아웃과 설렘 사이
우유 하나 사러
짧아서 더 반가운 2월.
예년보다 더 달궈진 호주의 대기를 가르며 달씨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때 한국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 가?”
“우유 사러 마트 가고 있어.”
잠시 정적 후, 전화기 너머로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진다.
“우유 하나 사러 마트를 간다고? 배달은 없어? 새벽배송도 안 돼?”
달씨도 웃었다. 뭐든 클릭 하나로 눈앞에 도착하던 나라 한국. 반면 지금은 우유 하나 때문에 차를 끌고 나와야 하는, 남호주 애들레이드의 현실 속에 있다.
현실의 터전으로 왔으니 이제 무거워진 몸과 다리를 깨워 움직이고 올해 참가할 마라톤을 신청할 타이밍이다. 달씨는 바빴던 숨을 가다듬고 자신의 달리기를 생각했다.
달씨의 달리기 3년
달리기 1년차, 달씨는 달리기 자체에만 집중하기도 버거웠다.
마라톤, 처음 만난 이 낯선 짐승을 어찌 다뤄야 할꼬 하며 온 신경을 몰두했다.
하프 마라톤이라는 목표해 둔 대회 말고는 다른 대회는 상상도 못 한 시절이다.
2년차가 되자, 한 달 한 달 작은 대회들을 찾아 도전해 보았다. 첫 풀코스 마라톤을 앞두고 거리 빌드업 한다는 차원이었다. 가까운 곳부터 먼 지역까지 다니며 차로는 알 수 없었던 길들을 밟으며 땀 흘리는 것, 새벽에 혼자 나가서 가져오는 늘어나는 메달들은 작지만 확실한 모험이었다.
2년차에 도전한 첫 풀코스 마라톤은 '어쨌든, 완주'. 자랑할만한 기록도, 성공적이라고 말할 것은 없지만 끝까지 버티며 드디어 '완주자'가 된 대견함이 있다.
3년차에 들어선 달씨, 그래서 첫 마라톤 후 애초 마음먹은 대로 호주 다른 도시의 마라톤들도 한 번씩 해보고픈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와 웹 세상에서 꿈의브라우징을 하고 있다.
위기와 러닝 붐!
그 사이 세상은 달리기와 마라톤을 향한 열기로 달궈지고 있었다. 기사와 책들을 읽다 보니 사람들은 힘든 시기마다 달리기를 했다 한다. 1970년대, 2차 세계대전 후 사회구조 변화와 오일 쇼크로 인해 전후세대들이 러닝 붐을 일으켰고, 2008년 금융위기를 지나며 또 한 번 달리기로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2020년대 초반 코비드로 인한 팬데믹을 지나며 다시 러닝이 인기 종목으로 급부상했다. 달리기는 힘든 시기에 가장 저비용으로 몸과 마음을 살리는 최고의 운동인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달씨는 생각했다.
한때 서구사회에서는 러닝은 '백인 중산층 남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처럼 여겼던 달리기와 마라톤, 이제는 남녀노소 국적과 직업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문턱이 낮은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달씨도이제 막 문턱을 넘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호주 주요 도시 마라톤
어쩌다 남반구 호주에서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달씨. 이곳에서의 마라톤은 코스만큼이나 풍경이 다양할것 같았다.
시드니에선 하버브리지를 건너며 도시의 심장을 뛰어넘고,
멜번에선 도심을 지나 MCG 거대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피니쉬를 한다.
퍼스에서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끝자락에서 세상 가장 먼 곳의 여유스러운 고립을 느낄 수 있고,
브리즈번에서는 다리를 건너며 강물이 호흡을 따라온다.
골드코스트는 써퍼들이 사랑하는 파도 소리를 따라가다 굽이굽이 바다 위 골목들을 누릴 수 있다.
호바트는 제주도 같은 섬이라 가는 것 자체가 특별한 여행의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수도 캔버라는 화려함은 없지만 호수와 국회의사당이 길동무처럼 묵직하게 서있다.
다윈이나 케언즈에서의 마라톤은 상상해 본 적은 없지만 트로피컬 지역의 숨결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가 있으리라.
애들레이드는? 흠.. 환상적 코스는 없지만 가까우니 언젠가는.
만약 미국처럼 52개 주라면 가야 할 곳이 더 많았으려나. 하지만 다행히 호주는 땅덩이에 비해 덜 나뉘어 있어 6개 주, 2개 준주로 되어 있다. 건강이 허락된다면 남반구에 사는 이점으로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하다며 혼자만의 꿈을 꾸는 달씨. '어느 곳에 갈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뿅뿅 뿅' 어린 시절 놀이처럼.
마라톤, 솔드아웃!
올해는 어디를 가볼까? 작년엔 시드니를 다녀왔으니 이번엔 다른 도시!
달씨의 여행에 큰 구실이 되어주기도 하는 마라톤을룰루랄라 찾고 있었다. 내심 가고픈 곳은 애들레이드에서도 비행기로 3시간 반 걸리는, 한 번도 안 가본 서쪽 도시 퍼스. "퍼스로 렛츠고~".
그러나 화면에 뜬 빨간 글자 SOLD OUT. 현실은 그랬다. 10월에 열리는 퍼스 마라톤, 2월 전 벌써 매진! 달씨는 러닝과 마라톤이 붐이라는 것을 마라톤들 매진 상황을 보며 실감했다. 분명 작년과 달랐다. 마음이 바빠진 달씨, 퍼스 포함 멜번, 골드 코스트, 브리즈번 옆 선샤인 코스트 등 찾아본 호주 주요 도시의 마라톤들은 모두 마감이었다.
그야말로 호주에서도 마라톤 인구가 늘어났다.
달씨는 모니터 앞에서 중얼거렸다.
“진짜 붐이네.. 내가 마라톤 신청을 찾고 있을 정도니.”
어쩌면 당첨될 수도?
한편 달씨는 "밑져야 본전" 하며 '습관성 신청'을 하는 분야가 생겼다. 바로 세계 7대 메이저 마라톤. 추첨 방식인데다 마라톤 신청 과열로 체감 당첨 확률은 그야말로 하버드 대학 가기보다 더 힘들다.
지난해, 베를린 런던 뉴욕 시카고 모두 신청해 봤지만 낙첨되었다. 당연히 안될 것 같지만 또 '혹시나 될지도 몰라.'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신청을 한다 (참가비는 인상되었지만 우선 신청하는데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니). 그리하여 그녀는 2025년 '뉴욕 시티 마라톤' 온라인 신청을 해볼 참이었다. 웹사이트를 여니 어마어마한 접속으로 트래픽이 걸려 신청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무작정 열어놓고 기다린 끝에 접수 완료. 신청 후 발표까지의 기대감이란 것이 복권을 사는 사람들의 심정일까?
확실히 달리기 속도보다 일 저지르는 속도가 빠른 달씨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꾸만 멀어지는 마라톤 신청.
아직 호주 내 마라톤은 못 정했지만, 어느 중년의 마음 한켠 작은 설렘이 한 방울 톡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