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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Jan 11. 2023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알게 된
것들

비운의 길이 아닌 희망의 길

“아니이...세상에에... 50넘은 사람이 10대랑 말이 돼? 말이? 서른두 살이나 차이 나는데?”     


저녁식사 중 갑자기 흥분하는 나를 보며 김치찌개를 서둘러 목으로 넘기곤 남편이 묻는다.  

    

“누구 얘긴데?”      


“요즘처럼 100세 시대도 아니고...그리고 부인이 한 두 명도 아니고...아들 딸 스무 명도 넘게 낳은 사람이 왕비가 죽었다고 또다시 19살 왕비를 들여? 선조 말이야! 선조오!!”      


남편은 어이가 없는 듯 입가에 웃음을 띠곤      


“나도 요즘 역사에 관심이 많이 가. 오늘 ‘KBS역사저널 그날’ 태릉 편 봤거든? 재밌더라고.”     


저녁 식탁에서 우리는 조선의 임금들을 반찬으로 추가했다.    

  

‘참내. 400년이나 더 지난 일인데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하지?’      




지난 주말 덕수궁 산책을 다녀온 후 요 며칠 새 나는 조선의 임금 중 선조에 꽂혀 있다. 긍정적인 쪽이 아니라 27명의 임금들 중에서 가장 대책 없고 무능한 임금이 아닌가 생각되어서다. 나라가 위급한 시기에 백성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 부지를 우선했던 군주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영화 등 여러 작품을 접하면서 선조를 알았지만 덕수궁을 다녀온 후 그가 열어갔던 덕수궁 궁궐 이야기를 들으니 지나간 400여 년이 마치 어제 일처럼 다가온다.


조선의 제14대 임금인 선조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41세였다. 16세에 옥좌를 물려받아 25년 동안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200여 년 동안 전쟁이 없는 시대가 이어졌으니 권력의 맛에 흠뻑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부산진에 도착해 파죽지세로 15일 만에 한양까지 진격해 올 때까지 아무 대책도 못 세우고 나 몰라라 곧바로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선조 일행을 보고 백성들이 “너도 임금이냐?” 라며 돌파매질을 했다고 한다. 피난길에 평양에서 선조는 분조(分朝)라는 명분을 들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전란을 수습하도록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선조는 1년 6개월 만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는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져 기거할 곳이 없어지자 당시 월산대군 후손의 사저를 빌려 임시 행궁으로 쓰게 된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 터다. 그러니까 덕수궁의 시작은 선조인 셈이다. 처음 이름은 경운궁으로 당시 선조가 머물던 건물이 석어당(昔御堂)으로 ‘옛날에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이다.


석어당 

                       

석어당은 궁궐 안에서 현존 유일의 2층 목조건물이다. 정전인 중화전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고 단청을 칠하지 않아 백골집으로도 불린다. 1904년(광무 8) 함녕전에서 온돌 수리 중 실수로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하는데 이때 중화전, 즉조당과 함께 석어당도 불에 타 이듬해 복원되었다.

         



41년간 왕위에 머물렀던 선조는 조선 왕 중에 최초로 직계 출신이 아닌 방계 혈통으로 왕이 되어 콤플렉스가 심했다고 한다. 바다에서 속속 승전보를 가져다준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도 시기하고 질투해 옥에 가두기까지 했으니까. 뿐만아니라 자신이 의주로 피난 간 사이 나름 조선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자신의 아들 세자 광해군마저도 미워하며 질투했다고 전해진다.    

  

선조는 정비인 의인왕후 박 씨와 빈 6명, 귀인 1명, 숙의 3명, 소원 1명, 상궁 2명 등 많은 후궁을 거느리며 20여 명이 넘는 자녀를 낳았음에도 정작 정비 의인왕후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다. 정비가 죽자 51세가 되는 1602년, 32세나 차이가 나는 계비 인목왕후를 맞이한다. 임진왜란 발발 후 급하게 세자로 책봉했던 아들 광해군(공빈 김 씨의 둘째 아들)보다도 9살이나 어린 나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목왕후는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선조는 그를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으나 신하들 간 의견이 엇갈려 뜻을 이루지 못한다. 정비 소생으로 적자 승계를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겠지만 조선 초기의 왕자의 난을 반면교사로 삼았다면 그런 결정을 안 했을 것이다. 적장자를 얻은 기쁨도 잠시 영창대군이 3세 때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우려했던 대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눈엣가시였던 영창대군을 귀양 보내고 증살(방에 불을 때 숨지게 함)하게 된다.      


광해군은 즉위 후 불탄 궁을 복원하기 시작하는데 창덕궁을 가장 먼저 착수했다. 그리고 경운궁도 또 다른 궁궐로 사용하기 위해 공사를 벌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퇴위된 후 공사는 전면 중단된다. 그리고 경운궁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후의 왕들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경운궁(덕수궁)이 다시 역사의 주 무대에 등장한 것은 270여 년이 지난 1897년,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34년) 때다. 다시 조선 침략의 갈퀴를 드러낸 일본은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아관파천(러시아공사관 피신)을 하게 된다. 1년 뒤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는데 이때부터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고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으로 한 단계 격상된다.  


고종은 당시 시류에 맞추어 서양식 건물들을 세워 나갔는데 대표적인 것이 석조전이다. 그 외에도 돈덕전, 정관헌, 중명전 등의 건물을 세웠다. 경운궁 주변에는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공사관 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 등 근대적 건축물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이 일대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절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 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아버지에게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지어 바치면서 그 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석조전 전경

                            


중화전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이다. 중요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거나 조회를 열던 곳이다. 황금색으로 도색되어 있어 초록색인 다른 궁 정전과 구별된다.


함녕전

              

안타깝게도 1910년 국권을 찬탈한 일제는 우리의 아름다운 궁궐을 파괴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창경궁과 마찬가지로 이곳 덕수궁도 여러 전각들을 없애 공원으로 꾸미고 도로를 내면서 규모가 1/3로 축소되기에 이른다.

  



덕수궁 하면 보통 일반인들은 그 뒤에 세 글자를 붙인다.      


‘덕수궁 돌담길’     


예전에는 덕수궁 돌담길 근처에 가정법원이 있었기에 이 길을 걸으면 남녀가 헤어지게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정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은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뿐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정동길

운치있는 정동길에 나무들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


덕수궁에서 다시 만난 400년 전의 선조와 100여 년 전의 고종황제 두 분이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1세기 지금 이 순간 1시간만이라도 잠시 깨어나 우리나라를 바라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기절초풍하지 않을까?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나라가 꿋꿋하게 살아남아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후손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을 것 같다. 내가 두 사람을 만난다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말해주고 싶다.  

   

“임금님... 별로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용서해 드릴게요... 지금 우리들보다 더 뛰어난 미래 세대가 동방의 이 작은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로 만들 거니까요. 편히 쉬세요~!”     


이런 상념에 빠지니 덕수궁 돌담길이 비운의 길도, 헤어짐의 길도 아닌 희망의 길인 듯하여 마음이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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