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친 2주간의 기억
bebe, look at me!
Please trust me and stay here.
I'll quickly recover fully
and return soon
밤새 고민했다.
'이게 현실이 맞을까?'
'오진일 확률은 없나?'
MRI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엔 도저히 이곳의 의료진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같이 일하면서, 이곳 의료진들이 한국 의료진에 비해 손도 거친 편이고, 작은 것조차 크게 생각하는 성향이 짙은 편이라고 느꼈던 터라 더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오빠 왼쪽 어금니 위쪽으로 있는 염증주머니를 오진 한 건 아닐까?'
'매우 매우 작다고 표현한 걸 보면, 확신이 없는 건 아닐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뿐인 나의 연인이 아프다는 사실을. 오후 1시부터나 면회가 가능하다는 건 알았지만 나는 '프렌치 타임'을 믿고 11시쯤 병원으로 갔다. 가장 빨리 도착한 보호자였지만 역시나 따로 제재는 하지 않았다.
"우리 오늘 퇴원하는 거지?"
"오빠, 나도 잘 모르겠어. 신경외과랑 협의 끝나고 알려준다고 했으니까 기다려보자."
내가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퇴원을 물어보는 오빠에게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내가, 급하게 잡은 한국 병원 예약을 놓치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예약일을 맞추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장 이번주 일요일 비행기를 태워 보내야 했다. 하지만 병원에선 별다른 퇴원에 관련된 얘기는 없이, 찾아오는 담당 의료진도 없이 오빠 병실을 3층 신경외과 쪽으로만 옮기고 있었다. 정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오, 좋은 오후. 기분은 좀 어떠니?"
신경외과 쪽으로 옮기고 두세 시간이 지나 슬쩍 병실 창문 밖으로 노을이 비칠 때쯤, 흰머리가 지긋한 교수님과 7~8명 정도 되는 인턴 학생들이 우르르 병실로 들어왔다. 간단한 증상확인 질문들이 오고 갔다. 나는 그가 당장이라도 병실을 나갈까 봐 급히 비행스케줄 관련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주 일요일 비행기라 그전에 퇴원수속을 끝내고 싶어. 결과는 나왔니?"
"음.. 우린 약간의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비행기를 타겠다는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어."
비행기를 문제없이 탈 수 있고, 그 스케줄에 맞춰 퇴원이 될 것 같아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고마워. 대신 퇴원 하고도 병원에 갈 때까지의 항경련제를 처방받고 싶어"
"물론."
"그리고.. 내가 아직 그의 암에 대한 결과를 보지 못했어. 혹시 MRI 결과를 나도 좀 볼 수 있을까?"
"아! 그랬어? 물론이지."
우리는 병실밖 복도로 나와 남편의 차트와 MRI결과창을 화면에 띄웠다. 내 주변으로 7~8명의 인턴들이 에워싸고 함께 화면을 보고 있었다.
"어?!... 저기.. 이거 내 남편 거가 맞니?"
"응! 무슨 문제가 있어?"
"나는 어제 분명 그의 암이 매우 작은 암이라는 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응? 그럴 리가? 이렇게 큰데.. 누가 그런 얘기를 했니?"
"감염내과병동에서.. 아무튼 지금 이.. 이 사진이 내 남편 결과가 맞는 거지?"
"흐음.. 그래. 나도 매우 유감이야."
까만 바탕에 하얗게 찍혀있는 오빠의 뇌 사진 안에는 까맣고 커다란 덩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거진 장경이 7cm 정도는 되어 보였다. 논문 속에서만 보고 읽던 사진이었는데, 막상 내 일이 되니 생각의 처리속도에 오류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내 말은.. 내 의견은.."
빤히 쳐다보는 수십 개의 파란 눈동자들에 둘러싸인 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보려 노력했지만, 계속해서 오류만 났다. 그리고 갑자기 숨쉬기도 버겁게 느껴지며, 온몸에 한기가 스며 말을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의사는 내 반응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나는 여전히 아찔하기만 했다.
"사실, 너의 남편은 수술이 필요해.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너가 전문가잖아. 솔직히 말해줘. 사진상으로만 놓고 봤을 때 몇 단계라고 예상해?"
나도, 정확한 건 조직검사 후 세포배양을 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의사들을 곤란하게 한다는 것도. 하지만 막상 내가 보호자 입장이 되니, 정확하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전문가의 예상과 의견이 듣고 싶어 지더라.
"난 확실할 순 없어. 다만 악성종양임은 알겠어."
"암 조직의 모양 때문이구나?"
"맞아.. 그리고 내 동생은 작년에 같은 병으로 죽었어. 그래서 나도 매우 유감이야. 빨리 수술을 했으면 하고."
"?!"
프랑스인들은 의사여도 영어가 매우 서툴다. 그래서 단어 선택이 다소 거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의 동생의 사망 소식에 그나마 남아있던 영혼마저 털리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위로일까? 아님 심각성을 알리고 싶어서일까? 뭐가 됐든, 그때의 나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그냥 당장이라도 내 남편은 한국에 보내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말이었을 뿐이었다.
"일단, 알겠어."
"퇴원은 토요일 오전에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도록 할게"
"오늘은 수요일인데.. 그때까지 그럼..?"
"뇌파검사와 함께 필요한 추가적인 검사들도 더 해볼 생각이야.
그리고 우린 그가 경련이 재발하지 않도록 약을 복용하며 병원에 있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어."
"알겠어. 그럼 토요일 오전퇴원으로 나도 준비할게"
퇴원 날짜가 정해진 이후, 오빠와 나는 그냥 평범했던 어느 날들처럼 같이 웃고, 떠들고, 산책했다.
그러다 저녁 8시가 되어, 그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면 그제서야 크게 울었다. 원래도 길치인 나는 숙소에서 병원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그가 입원해 있는 5일 내내 헤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오빠손만 잡고 있으면 그냥 걷기만 하면 되던 불과 1주일 전의 평범했던 날들이 떠올라 더 서러워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나는 무엇보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인생이 무서웠고, 한없이 두려웠다.
그렇게 토요일, 퇴원하는 날이 왔다.
다행히 병원을 나온 이후부터 오히려 컨디션이 회복된 남편은 내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고, 내 손을 잡고 한가로이 산책했다. 모처럼 잠도 함께 푹 잤다. 5일 만의 꿀잠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 그는 나를 불렀다.
"애기야 이리 와봐."
"왜?"
분주하게 열차번호를 확인하던 나를, 그는 돌려세워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했다.
"애기, 오빠 눈 봐봐."
"?"
"잘 들어 여보.
나는 수술 잘 받고, 잘 회복해서 돌아올 거야.
오빠 믿지?"
"응.. "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안심이었는지, 아님 서러움이었는지는 모를 눈물이었다.
"자기랑 알고 지낸 16년간 나, 약속한 거 안 지킨 적 한 번도 없잖아 그렇지?"
"응"
"좋아. 그러니까 오빠 믿어줘 여보.
그리고 여보는 여기서 기다려줘."
"싫어.. 오빠.. 나도 정리되는 대로 한국 들어가고 싶어"
"안돼. 진짜 오빠 믿고 여기서 기다려줘.
여보가 여기서 단단하게 기다려주면, 내가 정말 금방 회복해서 올게. 할 수 있지?"
"왜..? 왜 그래야 되는데..?"
"오빠가 말했잖아. 능력 있고 열정도 있는 후배, 이렇게 멈추게 하고 싶지 않다고.
남편으로서도 선배로서도."
"싫어 나도 따라갈 거야"
"여보, 나 진짜 이겨낼 거야.
그때 내가 다시 이 일을 할 수 있게 지금은 자기가 버텨줘야 해. 제발 부탁할게."
그는, 내 남편은, 이 상황에서 조차도 그의 일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는 내가 항상 오빠가 원하는 걸 꼭 들어주고 싶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나는 그의 간절한 바람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린 한번 더 장거리 부부를 선택했다. 그렇게 남편은 한국으로, 나는 이곳에 남아 10배 더 멀어진 거리를 극복해 보기로 결정했다.
정말 우린 8개월의 장거리 부부가 돼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