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나 계속된다.
But life just keeps going
'휘오오오오'
창문을 닫아 뒀는데도 외창이 흔들리며 바람소리가 난다. 오래는 유난히도 바람이 세다. 몇 주간 내내 비도 간간히 흩뿌려 그런지 도무지 해가 안 보인다.
코를 훌쩍이며, 우리 치치(남편과 작년 여름부터 키우던 햄스터)가 추울까 얼른 초를 켜줬다. 온 방안에 은은한 촛불이 번진다. 일렁이는 촛불을 보고 있자니, 지난주 동안 나에게 벌어진 일들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지금이라도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늘 누려왔던 그 현실로.
잃어보니 내가 가졌던 게 뭔지를 깨닫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건, 내가 그 말을 뼈저리게 느껴볼 일 이 없어서였을 뿐임을.
'요즘 자주 깜빡거려'
'나 살쪘는지 오래 앉아있으면 울렁여. 고무줄 바지 살까 봐'
'아, 나 어릴 땐 되게 똑똑했는데.. 요샌 늙어서 그런가 머리가 비상하지가 못한 기분이야'
남편이 툭툭 말해왔던, 수 없이 많은 시그널들이 뇌종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뇌종양 전조증상'으로 바뀌어 내 머릿속으로 자꾸만 재 방문 했다. '왜 그때 놓쳤을까' 자책도 해보고, '헛 공부 했다'며 속도 상해 보지만, 어차피 내 소가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쓰리고 답답했다.
오빠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휴가를 썼다가 다시 재 출근한 날, 책상엔 꽃다발과 함께 정성 들여 쓴 한글쪽지가 보였다. 행운을 빌어준다는 말이 아릿하게 읽혔다. 지금 나는 그 누구보다 행운이 필요하니까.
남편을 급하게 한국 병원으로 보내고 난 이번주 내내, 일상 곳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이 5년 정도 함께 이곳에서 근무를 했던 터라, 지금 나와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오빠와 친분이 있다. 게다가 근무기간 내내,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사교적이었던 남편은 이 센터 내에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소식을 들은 동료들은 이번 주 내내 매일같이 날 찾아왔다. 누군가는 안아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말없이 어깨를 도닥여주기도 하고, 그리고 몇몇은 나보다 더 울어줬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는 성격이라, 찾아와 준 동료들의 대부분은 평소에 나와 가벼운 인사정도만 나누던 사람들이었다. 오빠가 쌓아둔 덕을 내가 받고 있구나 싶었다. 개인적으로 타인의 위로나 공감은 어색하기만 했었는데, 의외로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의 위로는 조금, 힘이 되더라.
"사람은 더불어 사는 거야. 위로도 격려도 얼마나 힘이 되는데."
"문제를 해결하진 못하잖아. 말은 힘이 없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야. 관계 자체가 주는 에너지라는 게 있거든"
"I타입인 나는 동의할 수 없다!ㅎㅎ"
"종교적으로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늘 주님이 계셔. 언젠간 오빠말이 와닿는 순간이 있을 거야 살다 보면"
웬만해선 모든 일을 혼자서 하는 나에게 남편이 늘 했던 말이었다. 처음으로 남편의, 어쩌면 선배의 말을 이해한 기분이다.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아하던 남편의 모습이 슬며시 물 들었을지도.
여하튼, 덕분에 나는 혼자 남은 프랑스의 첫 주도 씩씩하게 잘 견뎌냈고 이렇게 브런치를 쓴다. 오빠가 아프기 전엔, 오빠가 없으면 무너져버린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남편을 지켜내기 위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출근도 하며 일상을 살아내야 하더라.
물론, 7일 중 3일은 퇴근 후의 고요함 안에서 가끔은 꺽꺽 울기도 하고, 한 이틀은 멍하니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틀은 이렇게 글도 쓰고, 일기도 쓰고, 온라인 예배도 드린다.
5000km 떨어진 곳에 아픈 남편을 둔 아내의 일주일이 또 흘렀다.
아니 어쩌면 잘 견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