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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peltina Jan 25. 2024

일곱째 주; 똥을 쌀 용기

하고싶은거 하다 힘들면 덜 억울하다!

언니, 똥을 싸고 싶잖아?
그럼 똥을 싸도 돼!


프랑스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5살 차이의 여동생이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퇴근 후 깜깜한 밤이 지금까지 망설이는 나를 옆에서, 보다 보다 답답함이 폭발한 모양이다. 어린 시절부터 정반대의 성격으로 30년 단짝친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여동생의 외침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똥? 근데 있잖아.. 그래도.."

"뭐가 고민인 건데? 한국 가고 싶잖아"

"일단 휴가가 다해서 10일밖에 안되고 또.."

"언니, 언니 프랑스를 여행으로 다닐 땐 6박 7일로도 왔다 갔다 했어"

"엄마 아빠 입장에선.. "

"답답하네 정말. 엄마 아빠 입장 말고! 언니 마음은 어떤데?"


내 마음이라. 

모름지기 어른이라면, 마음이니 감정이니 하는 것들보다, 처한 상황과 현실을 파악하는 게 맞다고 배웠거늘. 

요 녀석 눈을 보니, 배운 걸 성실히도! 실천하려고 다짐하는 한심한 모범생 한 명이 똘망 똘망한 눈동자에 비칠 뿐이었다.


"언니 마음이 뭐냐고?"

"내 마음은.."


내 마음은 뭘까 섣부르게 답이 나오질 않았다. 

마음만 놓고 생각했던 게 도대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니, 이 정도면 충분히 방법을 까먹을 만 하지. 아니면 아직도 어른스럽지 못한 말은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붙잡고 있는 거거나. 


"언니, 오빠 수술 전에 얼굴 보러 한국 가고 싶잖아. 그래서 고민하는 거 아냐?"

"맞아.. 같이 크리스마스 보내고 싶어."

"그래! 그게 언니 마음이잖아. 근데 뭘 망설여."


갑자기 이 상황에,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을 딱 정리해 주는 동생을 보며,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정까지 매번 수천번은 망설이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나와는 다르게, 늘 요 녀석은 간단명료한 인생을 산다. 그런 동생이 부럽지만, 닮기에는 왜 이렇게 어렵나 싶다. 나는 뭘 하나 결정하거나, 행동하려고 해도, 신경 쓰고 고민할게 이렇게나 많은데, 쟤는 어떻게 저렇게 쉽고 간단할까 늘 궁금하다.     


"야.. 괜찮을까 진짜? 괜히 부모님이랑 오빠 사이를 망치는 건 아니겠지?"

"언니, 있잖아 똥 참으면 똥독 올라"

"?"

"똥이 싸고 싶으면 그냥 싸. 대신 싸고 나서 치우기만 하면 돼."

"치우는 게 힘들까 봐 그렇지."

"참는 건 쉽고?!"


맞다. 

생각해 보니 하고 싶은걸 매번 고민하고, 예측하며 참는 것도 쉽지 않다.

사실 나는 비행기 표 결제를 앞두고, 행여나 모를 상황들을 예측하며, 혼자 걱정부터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를 망설이게 하는 제일 큰 고민은 바로 부모님과 오빠와의 관계. 

갑자기 뇌종양이라는 사위도 걱정이시겠지만, 부모님은 내 엄마, 아빠가 아닌가. 심지어 오빠 아프고 나서 처음으로 금전적 도움을 요청한 큰 딸을 안타까워하며 도와주신 부모님이셨다. 이런 상황에 비행기까지 타고 건너가서 오빠 병수발만 하고 오는 모습을 보이면, 괜히 지금까지 오빠가 고생하며 잘 쌓아온 '최고 사위'라는 공든 탑을 와르르 무너트리는 게 될까 봐 무섭고 걱정됐다. 게다가 그런 일로 관계가 안 좋아진다면 아무리 부모님이 이해된다고 하지만 괜스레 내 안에 그런 부모님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생길까 봐 그것도 걱정이었다. 물론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일 뿐이지만. 사실 이런 걱정들과 온갖 경우의 수를 예측한다고 고민에 고민을 해봐도 몸과 마음만 지칠 뿐 일어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동생말이 맞았다. 참는다고 한 번도 힘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언니, 일단 저지르면 어떻게든 해결은 돼."

"그렇기야 하겠지.."

"그리고 하고 싶은 거 해서 힘들잖아? 그럼 그건 좀.. 덜 억울하다ㅎㅎ"

"!!!!"


당연한 말이고, 안다고 생각했던 말인데, 머리에 느낌표가 뜨는 기분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지금부터 미래의 나를 믿어주지 못하고 고민했나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오빠와 함께 보낼 수만 있다면 그게 뭐든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그리고 내 후년의 크리스마스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아까와는 다르게 거침없이 비행기표 결제 화면을 슬라이드 했다.

순간 갑자기 아빠한테서 연락이 왔다.


"우리 큰아들 수술 앞당겨졌어."

"정말? 아빠! 나 그날 한국도착해!"

"비행기표 끊은 거야? 아니, 어떻게 알고?"

"그냥 휴가라 끊었는데, 아빠한테 지금 딱 연락이 온 거야!"

"아휴 진짜 잘 됐다. 김서방이 좋아하겠다! 조심해서 와! 아빠가 마중 갈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방향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똥을 싼다고 생각하고 쌌는데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똥이 똥이 아니게 되었다. 허탈감에 어이가 없었다. 


"언니, 거봐. 언니가 걱정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잘 해결되지?"


전화통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동생이 어깨를 올리고 으스대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네 ㅎㅎ"


나도 마주 보고 웃었다. 

오빠가 아프고 나서 거의 처음으로 웃은 날이었다. 얼른 오빠에게로 날아가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떨어져 지낸 지 한 달 만에 오빠가 쓰러져 병원에서 만났고, 그렇게 또 오빠가 한국으로 가게 된 후 한 달 만에 다시 병원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다. 


정말 잊지 못한 2023년의, 스펙터클한 2달간의 롱디를 경험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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