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간의 기록을 마치며.
10번의 금요일이 지났다.
예상치 못한 일들로 꾸준히는 아니었지만 10번의 금요일을 채웠다. 늘 성실함이 모자란 나는 이것만으로도 셀프칭찬 가득.
너, 기특해!!
오빠의 수술은 다행히 잘 끝났지만, 오빠가 한국에서 앞으로 넘어야 할 치료과정들이 빼곡하다. 나는 나대로 여기 이곳, 애증의 프랑스에서 정해져 있는 근무기간을 성실히 마쳐야겠지. 물론 그와 더불어, 우리 부부 두 사람 몫의 행정처리들도. 그 말인 즉, 우리는 적어도 올여름까지는 예정했던 대로 8개월간의 롱디부부의 삶을 멈추지 않고 이어가게 될 예정. (그래도 이제 5개월 남았다!) 뭐.. 거리도 예정보다 훨씬 더 멀어지고 마음은 세제곱배쯤 더 힘들어지긴 했지만.
2023년은 평생 내게 여러모로 잊지 못할 한 해일 것 같다.
처음으로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았고, 처음으로 연재 브런치 북을 연재했다. 오빠는 원하던 직장에 성공적으로 이직했었고, 나는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한 서류에 사인까지 완료.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 롤러코스터.
좋은 일만 있을 리가 없지.
무방비 상태로 마주한 남편의 갑작스러운 뇌종양 선고는 우리 부부의 2023년 후반부를 통째로 쥐고 흔들었고, 우리의 예상과는 빗나간, 지금이 된 그때의 미래는 암담하고 깜깜해 보이는 어둠 그 자체였다. 끝이 언제일지 보이지도 않던 그 길을 각기 다른 곳에서 뚜벅뚜벅 걸으며 너도 나도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 만신창이.
그런 와중에도 (고작 10화이긴 해도) 포기하지 않고 완성까지 기록하며 달려온 나의 첫 브런치 북이니.. 아무리 어설프고 완성도가 낮아도 처음이라 용서될 수밖에. 나의 첫 책, 너는 정말! 어휴 사랑스러워.
얼마 전, 친한 언니가 추천해 준 유튜브 설교영상을 듣다가 인상 깊은 문장을 만났다.
햇빛만 가득하면 좋을 것 같지만, 햇빛만 가득한 땅은 사막이 됩니다.
잔잔한 바다는 적조현상으로 썩어요.
가끔씩 비도 오고 태풍도 불어서 땅에 물이 적셔지고 바다가 뒤섞이고 흘러야,
그래야 거기에 생물들이 살아요
-조정민 목사-
최근에 만난 문장들 중 내게 가장 큰 힘이 된 말. 괜찮아 잘될 거야 보다 훨씬 위로로 다가온 말.
누군가에겐 그냥 '어마나' 하는 일들 중 하나일 뿐일 수도, 어쩌면 나보다 더 큰 일을 겪는 사람들에겐 '뭐 저런 걸로' 하는 일일 수 있지만, 그 시간들을 겪고 감당해내고 있는 당사자인 나에겐 한 순간 한 순간이 무척이나 힘이 들고 괴롭고 아팠다. 지금도 그렇고. 그런데 저 문장을 마주하는 순간, 어쩌면 이 고통의 순간순간들 하나하나가 각자 다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구절 하나 못 외우는 나이롱 신자인 내 머릿속에서도 한동안 오래오래 살아남은 문장이다.
하. 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필로그의 제목이 저 문장이 아닌 초콜릿 상자인 이유.
엄마와 교환일기를 쓰던 나의 중학교 시절, 어쩌다가 한 번씩 행운처럼(?) 제사와 나의 시험이 겹치는 시기가 오면 공부와 뒷바라지를 핑계 삼아 엄마와 나는 집에 남고, 아빠와 동생들만 시골에 계신 할머니댁에 내려갔다. 그리고 그런 날 밤이면, 엄마는 항상 퇴근길에 아파트 앞 포장마차에서 닭똥집과 닭발, 그리고 엄마가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빌려오셨다.
박신양, 최진실 주연의 편지, 레오나르도디카프리오의 타이타닉, 그리고 톰 행크스의 포레스트검프.
엄마한테 짙게 풍기던 병원냄새를 맡으며, 깜깜한 밤에 거실에서 둘이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아 오도독 거리며 닭똥집을 씹으며 봤던 나의 보석 같은 영화들은 지금까지도 엄마와의 이야기 소잿거리다. 심지어 내가 오빠의 질병을 알게 되고 한국으로 보낼 준비를 하던 시기에, 혼자 남편의 짐을 싸다 울음이 터져 엄마에게 전화를 했을 때에 조차도.
"너 포레스트 검프 기억나?"
"기억나지.."
"거기서 그런 말 나오잖아. 인생은 초콜릿상자라고."
"..."
"이번달은 네가 좀 다크한 초콜릿을 깠을 뿐이야.
니 상자 속 초콜릿이 모두 다크초콜릿은 아니니까 울지 말고 다음 초콜릿은 좀 잘 골라서 까봐."
"깠는데 또 다크초콜릿이면 어떻게? 내 인생은 98% 카카오통이면 어떻게?"
"그럼.. 뭐 엄마 꺼랑 섞어먹어. 아님 코코 꺼랑. 아님 막둥이 꺼?"
"그게 뭐야ㅋㅋㅋ"
"야 그러라고 내가 힘들어도 셋이나 낳아서 키운 거야!"
내 인생의 상자 속 초콜릿들이 모두 쓴맛이라면, 그냥 좀 나눠 먹으면 된다는 신박한 해석에 기가 찼지만, 늘 당차고 씩씩한 우리 엄마다운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더 달게 느껴지는 내 초콜릿을 나눠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래서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쓴 초콜릿 맛을 조금은 달달하게 중화시켜 줄지도 모르니까. 오지윤 작가님의 말처럼 우린 작고 기특한 불행들을 나누며 연대하는 존재들 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첫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의 제목으로, 더할 나위 없이 초콜릿 상자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안녕, 나의 첫 번째 브런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