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국민 장난감 대신 지구를 구해볼게
이모들 덕에 럭키(둘째) 손가락발가락에 손싸개 발싸개 한 개씩 껴도 될 만큼 부자가 되었습니다.
대학동기 아홉이 모인 단체 대화방에 이 말과 사진을 올리니 매장을 열었냐는 둥, 빨아 쓰지 않고 일회용으로 써도 되겠다는 둥 친구들의 말이 이어진다. 한 번씩 쓰면 애가 커있을 것 같으니 물려받을 사람은 얼른 잉태하라고 답한다. 패리스 힐튼이냐고 묻는 친구의 말에 다른 친구가 몇 개의 아이템이 굉장히 눈에 익는다, 심지어 직접 준 적이 없는데도 사진에 보인다며 간증 아닌 간증을 한다. 그래서 덧붙인다. 우리 기쁨이(첫째) 것도 돌고 돌고 돌아왔고, 심지어는 남편회사사람의 아내의 친구인지 사촌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물려받은 것도 돌아왔다고. 이 정도면 자원순환 우수사례로 제출해야 할 것 같다는 다른 친구의 말에 다른 친구가 외친다.
ㅋㅋㅋ우리가 지구를 살렸다!
16년에 첫째를 낳았을 때 주변에 아기라고는 정말 1도 없었다. 내 새끼지만 처음 만난 아기부터 낯선 상황에서 하루 지나면 쑥 자라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육아는 아이템빨이라면서 꼭 사야 된다는 '국민' OO들이 왜 이리도 넘쳐나는지. 안 사면 안 될 것 같은데 안 사자니 부족하다 못해 나쁜 엄마가 되는 것 같은 기분에 늘 불쾌했다. 쇼핑을 싫어하고 온라인 쇼핑은 더더욱 싫어하는데 마침 휴직으로 돈도 없고 아직 운전도 못해 외출까지 자유롭지 않으니 겨우겨우 반강제로 적당히 외면했으나 몇몇 아이템은 '핫딜'이라는 고요한 외침에 귀가 멀어 구입하기도 했다.
사고 보니
모던한 톤으로 올수리 해서 들어갔단 집은 알록달록 거대한 장난감 전시장이 되었고, 우물쭈물하다 뒷북으로 구입하여 사용시기를 놓쳐 새것이나 다름없는 물품의 무덤이 되었다. 뒤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장난감 대여소에서 1-2주일씩 새로운 장난감을 빌려다 사용하긴 했지만 이미 소유한 것이 많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짐이 없었고, 창고가 커서 잘 정리하여 둘째를 주고자 했지만 19년에 찾아온 두 번째 아이는 빛을 보지 못한 채 떠나가고는 첫째가 다섯 살이 되어도 찾아올 줄 몰랐다. 이사를 앞둔 어느 날 돌연 친구들에게 말했다.
맞는 거 쓸만한 거 다 가져가. 그리고 만약 나에게 둘째가 생기면 다음 사람 주지 말고 나를 줘.
물려받은 것은 적고 중고거래도 지금처럼 활발하거나 다양하지 않아 새로 산 것이 대부분이었다. 둘째가 생기면 꼭 또 입히고 사용하게 하고 싶었던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그게 안 되니 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친구들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더니 저희들끼리 계속 대대손손(19, 20, 21(2명), 22년생) 물려주며 사용하고 불려서 물려주고 있었다. 그 물건들이 거짓말처럼 둘째가 찾아온 우리 집에, 모두에게 돌아가며 쓰임을 마친 뒤 느지막이 돌아왔다.
동시에 여섯 명의 첫째들을 거쳐 나의 둘째에게 온 물건들을 보며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마음, 잘 쓰고 넘겨줘야 한다는 의무감 혹은 사명감이 들었다. 내돈내산일지언정 돌아가며 쓰고 보니 빌린 것처럼 깨끗하고 튼튼하게 흘려보내서 이 아이에게 장난감보다 더 중요한 환경을 물려주고 싶다는 거시적인 생각마저도.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모르는 물건보다 더 상태가 보장되는 것이기도 하고 사용한 아이들 모두 건강하게 잘 크고 있으니 그 기운도 이어받았으면 하는 이상한 바람도 생겼다. 첫째 때 물건을 오랜 기간 동안 창고에 보관했던, 지루한 기다림을 또 하지는 않으리라, 바로바로 비우리라는 다짐과 함께.
그러나 주변에 아무도 임신 소식을 들려주는 이가 없어 덩치 크고 상태 좋은 물건을 몇 가지 당근으로 보냈을 무렵,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아기를 기다리던 동생의 소식이었다. 귀여운 아기가 세상에 또 온다는 기쁨과 함께 나와 친구들이 애착을 갖고 사용한 물건들이 갈 곳이 생긴다는 안도감, 집을 또 비워내고 여유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설렘이 함께 느껴졌다. 다만, 물건의 상태는 보장하지만 종류나 디자인에 따라 선호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임신소식을 듣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다 너무너무 좋다는 것 아닌가. 세상에 내가 더 좋았다.
첫째 때 물건을 물려주기 전엔 요상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물려준다면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하나. 가만, 이거 다 사느라 얼마쯤은 들었을 텐데, 얘는 나 애 낳고 내복 한 벌 안 사줬던 것 같은데, 우리 애를 한 번이라도 안아준 적은 있었던가 같은 계산적인 마음 말이다(달라고도 안 했는데. 물려주지 않으면 쓰레기통 아니면 창고행일텐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친분이 없다고 생각했던 직장 동료들이 임신과 출산을 축하한다며 선물을 전해주고 아이를 안아준 것에 비해 오히려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은 그런 것이 딱히 없었다. 물론 뭘 해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비교하는 마음이 들고 느닷없이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마음에 든다며, 잘할 것 같다며 본인이 활동하던 연구회에 같이 가자고 했던 선배 선생님이 떠올랐다. 감사하게도 나의 첫 아이에게 첫 내복 선물을 주셨던 그분. 나보다 일 년인가 이년 먼저 임신을 하셨던 그분에게 난 뭘 해드렸더라. 축하의 말 말고는 마음을 담아 선물을 한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주제에 내가 받은 것에 대해 재고 있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기는커녕 결혼도 하지 않았던 20대의 친구들은 나의 임신과 출산을, 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거나 환영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냥 몰랐던 거였다.
이걸 알았을 땐 그 선배 선생님과 근무지역도 달라진
뒤였다. 늦어 민망하지만 기프티콘으로나마 미안했다고 마음을 전하고는 친구들에게 기꺼이 창고대개방을 할 수 있었다(그뒤로 임신한 친구들에게는 아기용품대신 엄마를 위한 선물을 꼭 한다). 기뻤다. 그리고 바란 것은 아니지만 창고 속 물건들이 복리처럼 불어나 돌아와 둘째를 반겼고 둘째를 키우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불어난 이것들이 또 누군가의 첫째에게 가서 이만큼이나 건강한 아이들이, 그 부모들이 너를 환영한다고 말해주듯 시간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
블랙프라이데이라고 소비요정들이 신이 나 있는 요즘, 물건을 보며 생각한다. 이게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많은 자원이 들어갔을까. 사용되는 기간은 얼마며 지구에 남아 썩는 기간은 얼마나 될까.
사실 나도 쇼핑은 귀찮고 싫어도 새 물건이 싫은 것은 아니며 아이들에게는 새것 중에도 더 좋은 것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 애 때 중고로 유모차를 구입해서 유모차 구입 비용을 아꼈다고 그 돈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보다 오래 남아있을 것이 확실한 이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필요에 의해 쓰이고 아이들을 괴롭게 하는 데엔 안 쓰였으면 하는 그런 마음도 조금은 있다.
그러면서도 산타할아버지에게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물어보는 부족하고 이중적이기도 한 엄마는 일단은 기쁘게 비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에 감사하겠다. 그리고 어차피 한 번이라도 쓰고 나면 중고인 것을, 특히나 이 시기엔 정말 잠깐 쓰고 넘어가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내 아이에게 최고의 물건을, ‘국민’이라고 붙은 것을 최대한 많이 갖추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음을 스스로에게 꾸준히 상기시키려 한다. 이제 곧 10개월을 앞둔 둘째에게 옷, 장난감, 이유식 물품까지 합쳐 새것을 사준 게 10개가 채 안 되지만 미안해하지 않고 뿌듯해하겠다. 많이 비우고 덜 사고 집중해서 입과 몸으로 놀아주겠다. 장난감에, 옷에 돈을 덜 쓰려는 꼼수로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적절히 소비하기 위해 정신을 다잡아보겠다.
기쁨아, 럭키야, 엄마가 안 쓰고 안 사서 얼마나 남겨줄지 모르겠어. 아마도 놀고먹는 데 다 쓸 가능성이 크겠지. 그래도 이모들이랑 지구를 구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