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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클로이 Dec 21. 2022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나는 나와 사랑에 빠졌다.

벼랑 끝에 서 있었던 33살의 내가 했던 최고의 선택

'제가 좀 일찍 도착해서요. 혹시 일찍 오셨다면 이태원역 카페스미스에서 뵐게요.'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조금은 이른 시간에 도착한 나는 역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켜놓은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손을 녹이며 만나기로 한 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남동에서 잡혀있던 입사 면접이 예상외로 일찍 끝났고, 더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음이었다. 혹시나 해서 보낸 문자에 그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저, 커피스미스에 앉아있어요.' 정말 우연히 그도 나와 같은 카페에 일찍 도착해 앉아있었고, 그렇게 돌아본 창가 자리에 쌀쌀한 날 눈에 띄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파란 눈의 그가 있었다. 


지원한 회사에서 면접을 보고, 면접을 본 회사에서 합격 통보를 받고, 만나기로 한 새로운 인연을 운명처럼 같은 장소에서 마주친, 정말 어느 영화에서 일어날 법한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2020년 10월 8일, 선한 미소가 예뻤던 그를 앞에 두고 나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일어나 발걸음을 내디딘 나 자신에게 더 먼저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2018년, 만 30살의 생일을 미국에서 맞이하고 나는 그대로 한국행 길에 올랐다. 


미국에서의 취업 실패는 나의 낮았던 자존감을 더 깎아먹었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금의환향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 혼자 속삭여 울어버렸다. 대학원 교수님의 소개로 한국에서 바로 시작할 나의 전공 관련된 일을 찾긴 했지만, 정직원도 아닌, 연구직도 아닌, 인턴십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나니 주변에는 취업에 성공하는 - 주로 미국 국적 - 친구들이 늘어났고, 그만큼 결혼을 하는 - 주로 외국 국적 - 친구들도 늘어났다. 정말 우스갯소리로 우리끼리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 취업을 못하면 결혼이라도 해야 한다고 농담처럼 주고받았었다. 그만큼 '외국인으로서의 신분'은 아무리 미국에서 학업을 마쳤어도 유학생들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 힘으로 취업을 하지 못했다면, 신분을 바꿔서라도 취업을 하라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다들 학위를 취득한 나라에서 각각의 방법으로 자신의 새로운 삶의 기반을 다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삶은커녕, 그토록 원하던 연구직을 얻지 못함은 물론이고, 만나던 사람에게 뻥하고 차여버려 막말로 결혼 찬스라는 것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디서라도 커리어 우먼으로써 나의 경력을 다지면 된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한국에서는 나의 영어 실력과 미국에서 쌓았던 연구 경력의 어드밴티지를 활용해서 원하는 연구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한국엔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고 석사 연구 경력은 없느니만 못했다. 한국의 연구직들은 석사가 아닌 박사들을 원했고, 나는 또 한 번 나의 석사 타이틀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현실에 부딪히고 말았다. 


난 뭘 위해서 다른 나라에서 큰돈을 써가면서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했던 것인가 싶었다. 인턴십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갈아 탈 직장이 없는 백수였다. 석사를 마친 백수는 말만큼이나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주변에선 그동안 쉴 틈 없이 달려왔으니 한 숨 돌리는 때라고 생각하라고 했지만, 1 년 넘는 공백기에 나날이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고 드넓은 광야에서 나는 갈 길을 잃어버렸다. 내 자존감은 더욱 낮아져만 갔고 내 멘탈은 손대면 깨져버릴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30대에 들어서니 지인들의 결혼과 출산 소식은 왜 그렇게 들려오는 것인지, 다들 나보다 몇 발자국 훨씬 더 앞서가는구나 싶었다. 나는 아직 내 갈 길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인생을 수순대로 밟아가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은 뒤처져있었다. 결혼은 머나먼 이야기였거니와,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쓰임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는 누군가를 만날 용기도 안 났고, 새로운 사람은 아예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살얼음판 같던 나의 멘탈은 내가 많이 사랑했고 의지했던 나의 강아지가 갑작스럽게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서 와장창 박살이 나버렸다. 


나는 도움이 필요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안 좋은 일은 좋은 일만큼이나 빈번히 온다. 사람들은 고비가 닥쳤을 때, 인내하고 이겨낸다. 이겨낼 만큼의 고통이 오는 것인지, 어떠한 고통도 견뎌낼 만큼 강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대개 툭 털고 일어나 다음 다가올 일을 맞이한다. 그런데 나는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휘몰아쳐오는 머피의 법칙 속에서 그 이겨낼 힘을 잃어버렸다.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만이라도 생겨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절실함에 전문가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요청했다. 생애 첫 방문한 신경정신과에서 나는 우울증, 불안장애, 그리고 공황장애를 진단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나는 매주 신경정신과 선생님에게 상담을 받았고 알맞은 약도 처방받아서 매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약 덕분인지 빠르게 무기력감이 회복되고 제시간에 수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짓누르던 무기력감이 회복되니 놀랍게도 나는 서서히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씩 내가 갇혀있던 바운더리의 밖으로 손을 뻗었다. 형부의 권유로 스타트업 회사에 영문 에디터 자리에 지원해보았고, 한국에 온 대학원 동기의 소꿉친구가 만나서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에 그러자고 긍정의 답장도 보냈다.  




2020년 10월 8일 만난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그 남자는 지금 나의 피앙세가 되었다. 영화 같은 만남이었지만, 여느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피앙세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나를 구해주기 위해서 짠하고 나타난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나의 껍질을 깨고 나왔을 때 딱 알맞은 시기에 만나게 된 조력자였고, 내가 다시 일어서는 여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응원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일을 하고 연애를 하며 새로운 시작을 즐기면서도 나는 지속적으로 신경정신과의 도움을 받았다. 한국 나이 33살, 나는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나의 커리어를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내가 이루어온 '경력'으로 나의 가치를 매기면서 아주 잔혹하고 매섭게 나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떠한 '업적'을 이루지 못했어도, 난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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