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봉숭아

by 이화

앞뜰에는 계절마다 아이의 눈동자를 채워주는 다정한 친구들이 찾아와 인사를 건넵니다. 고개를 한껏 들어야 눈이 마주치는 커다란 해바라기, 옹기종기 소꿉놀이하고 있는 땅꼬마 채송화, 그리고 달콤한 꿀물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루비아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친구는 송이송이 꽃방울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봉숭아입니다.


아이는 오늘도 봉숭아 앞에 가만히 쪼그려 앉습니다. 싱그러운 초록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내민 꽃송이들이 너무나 곱습니다. 어느 줄기에는 진한 자줏빛이, 또 다른 줄기에는 사랑스러운 분홍빛이, 그리고 한쪽에는 순백의 봉숭아가 환한 미소로 아이를 반깁니다. 엄마는 이 예쁜 꽃이 뱀을 쫓아준다고 합니다. 뱀은 봉숭아 향기를 싫어한다면서요. 아이는 작은 코를 꽃잎에 바짝 대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이 은은한 향기를 왜 싫어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입니다.


아이가 봉숭아 친구들의 몸 여기저기를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물이라도 찾은 듯 방긋 웃음을 터뜨립니다. 무엇을 찾은 걸까요? 바로 통통하게 물이 오른 씨앗 주머니입니다. 손을 대면 '톡' 하고 터지는 그 경쾌한 감촉이 아이는 신이 나는 모양입니다. 가만히 주머니를 쓰다듬으면 보드라운 솜털이 느껴집니다. 까슬하면서도 보드라운 솜털 속에 몸을 숨긴 씨앗들은, 어쩌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아이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가장 불룩한 곳을 살짝 누르자 여지없이 까만 씨앗들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아이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다음 보물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이번에는 한 번에 더 크게 터뜨릴 수 있도록 배가 통통하게 부른 주머니를 신중하게 골라봅니다. 하나, 둘, 셋…. 자리를 옮겨가며 손가락 끝을 맞댈 때마다 아이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갑니다. 까망 아기 씨앗들은 아이의 손길을 빌려 드넓은 세상 밖으로 힘차게 튀어 나갑니다.


봉숭아는 참으로 고마운 친구입니다. 무서운 뱀도 막아주고, 고운 빛깔로 눈을 즐겁게 해주며, 즐거운 놀이감이 되어주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손톱마다 발그레한 다홍빛 설렘을 들여준다는 점입니다.


아이는 봉숭아 잎과 꽃을 옷자락에 한가득 담습니다. 작년 이맘때, 할머니가 열 손가락에 빨갛게 물을 들여주시던 포근한 기억이 떠오른 모양입니다. 오늘 저녁, 언니와 동생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손톱 위에 꽃잎을 올리고 실로 꽁꽁 묶어두면, 내일 아침 아이의 손끝에는 향긋한 다홍빛 꽃잎이 다시 피어날 것이니까요.


아이는 한 손으로는 옷자락 가득 담긴 봉숭아를 소중히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복하게 핀 꽃송이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작별 인사를 합니다. 봉숭아 역시 내일 아침이면 예쁘게 물들어 있을 아이의 손가락이 몹시도 궁금한 걸까요? 꽃송이들이 바람에 고개를 흔들며 한들한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배웅하고 있습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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