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으면 푹신했던 풀은 이제 제법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질겨졌습니다. 멀리서 내다보면 초록색 이불을 들판에 고르게 깔아놓은 듯 매끄러운 자태가 참 보기 좋습니다. 여름내 뜨거운 햇빛을 듬뿍 받아낸 풀들은 이제 저마다 길쭉한 대롱을 뽐내며, 그 끝에 아기 씨앗들을 앙증맞게 달고 있습니다. 언니는 하얀 편지봉투 하나를 들고 윗뜰 잔디밭으로 향합니다. 아이는 어김없이 언니를 놓칠세라 얼른 뒤를 따라가네요. 오늘은 또 무슨 놀이를 하는 것일까요?
부지런히 올라간 잔디밭에는 이미 동네 언니와 오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합니다. 먼저온 아이들의 손은 잔디 위를 스치다 이내 하얀 편지봉투 속으로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합니다. 언니도 얼른 자리를 잡고 잔디풀 끝을 가만히 잡아당깁니다. 손바닥을 펴자 깨알 같은 작은 씨앗이 줄줄이 봉투 속으로 쏟아져 들어갑니다. 잔디풀 사이사이 대롱에 매달려 있는 씨앗을 정성껏 훑어내고 있는 것이었네요.
언니는 이것이 여름방학 숙제라고 말합니다. 편지봉투 하나를 씨앗으로 가득 채워가야 하는 것이지요. 숙제란 그저 연필로 공책에 글씨를 꾹꾹 눌러쓰는 것인 줄만 알았던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이내 언니를 도와 부지런히 손을 보탭니다. 어느새 동네 언니 오빠들의 편지봉투는 배가 볼록하게 불러옵니다. 그 모습에 아이의 마음도 괜스레 급해집니다.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대롱이 유독 굵고 큰 씨앗을 찾아봅니다. 아이도 이제 한 번에 쓱 훑어야 한 알도 빠짐없이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네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작은 손을 잔디풀 속으로 넣었다 뺐다를 반복합니다.
한참을 질세라 정신없이 움직이는데, 갑자기 아이의 눈앞으로 무언가 "폴짝!" 하고 뛰어듭니다. 초록색 잔디풀 하나가 "톡" 하고 살아 움직이듯 튀어 오르는 모습에 깜짝 놀란 아이는 그만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주저앉고 맙니다. 편히 쉬고 있던 제 집을 샅샅이 뒤지는 불청객 때문에 메뚜기들이 귀찮은 듯 손을 피해 뛰어오른 것이었네요. 마치 초록색 잔디풀이 땅에서 "쏙 쏙" 뽑혀 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아이는 잔디 씨를 모으는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합니다. 잔디색을 꼭 닮은 메뚜기를 잡는 데 온 마음을 뺏겼으니까요. 손바닥을 크게 벌려 풀숲에 숨어 있는 녀석을 잽싸게 덮쳐보지만, 메뚜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파닥파닥 아이와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요리조리 도망칩니다. 아이도 메뚜기를 따라 껑충껑충 뛰어봅니다. 드디어 한 마리가 아이의 손에 잡힙니다. 매끈한 초록색 신사복을 차려 입은 방아깨비네요.
아이가 조심스레 가느다란 뒷다리 끝을 살짝 움켜쥐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쿵덕쿵덕" 정겨운 박자에 맞춰 방아를 열심히 찧기 시작합니다. 연둣빛 긴 더듬이를 허공에 살랑살랑 흔들며 부지런히 제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아이의 눈에는 그저 신기합니다.
한참을 신나게 움직이던 녀석의 방아질이 조금이라도 느려질라 치면, 아이는 손을 살짝 흔들어 다시 힘차게 방아를 찧게끔 재촉해 봅니다. 그러면 다시금 기운을 내어 쿵덕쿵, 퉁덕쿵 기분 좋은 장단을 만들어냅니다. 아이도 초록색 신사의 박자에 맞춰 고개를 '끄덕끄덕' 함께 흔들거려봅니다.
문득 눈을 돌려보니 언니는 벌써 저만큼 앞서가 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아이는 방아깨비를 한 손에 쥔 채 다시 잔디 씨를 훑어봅니다. 언니의 봉투는 아직 홀쭉하기만 합니다.
아이는 까딱까딱 정겹게 방아를 찧던 초록색 신사를 이제 그만 가만히 놓아주기로 합니다. 손바닥 위에 잠시 머물던 간질거리는 느낌은 뒤로하고, 풀숲으로 돌려보내는 아이의 손길에는 아쉬움보다 곧 다시 놀자는 약속의 마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유를 찾은 초록 양복의 신사는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아이의 발치에 조용히 머물러 있네요. 마치 기특하게 숙제를 해나가는 아이를 대견하다는 듯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것만 같네요.
하얀 봉투 안에는 동글동글한 잔디 씨앗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습니다. 봉투 안 가득 번지는 싱그러운 풀 내음 사이로, 풀밭 친구들과 다시 놀고 싶은 아이의 설렘도 함께 소복하게 차오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