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도 예외는 없었다. 순하기로 유명한 아이도 이제 중2를 앞두고 자신이 그저 아기가 아니라는 듯 반항어린 눈빛을 장착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스트레스성 두통과 복통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는 제주도 여행이 가고 싶다고 방학 전부터 주문 외우듯 말했다. 올해 들어 내가 하는 온라인 쇼핑몰 매출도 좋지 않아 여행은 물론 생활비도 빠듯한 실정이다. 그런데 남편이 어디서 돈이 났는지 여행경비를 대줄테니 다녀오라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돈 생각은 간데없이 비행기와 숙소를 단숨에 예약해 했다. 이전에도 제주도에 간적은 있지만 매번 아이 친구네나 남편과 동행해서 나의 부담이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의치 않아 내가 주도하에 모든 것을 결정해가며 여행계획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엔 철저히 아이가 좋아할만 장소 위주로 스케줄을 짰다. 제주도 노래를 불렀던 아이조차 “갑자기 왠 제주도야?” 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너의 바람을 누군가는 듣고 있었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첫날 오후에 도착한 협재해수욕장은 노을지는 모습부터 볼 수 있었다. 간단하게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와 카페에 들렀다. 비양도가 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겨울 바다는 어둡고 조용했다. 밤이 오자 해변가는 더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고 카페에 앉아 검은 바다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아이도 나도 별말없이 바다를 보다 핸드폰을 보다 카페를 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몰랐다. 그러고보니 평소에도 먹고 싶은 것을 묻는 것과 숙제를 체크하는 말 이외에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숙소에 돌아와 아이는 핸드폰 게임을 하고 나는 일기를 적었다. 낯선 곳에 우리 둘밖에 없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일정은 근처에 곶자왈이라고 제주 숲이 있다고 해서 가 보기로 했다. 마침 곶자왈에 도착했을 때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비 오는 숲 속을 좋아해 그 진한 나무 향기와 습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 쉬었다. 아이는 원래 어릴 적에 ‘숲동이’라는 공동육아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숲에서 아이는 더 자유로워 보였고 걸음이 늦은 나를 기다리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걸었다. 내가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리드하는 코스가 되어 버렸다. 어쩐지 아이가 듬직하게 여겨졌다. 숲은 잠시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해 우리에게 좀 더 가까웠던 시절이 있었음을 환기시켜 주었다.
둘째 날은 수영장이 있는 호텔이었다. 겨울 제주를 가면서 아쉬웠던 것은 바다에서 수영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수영을 좋아하는 나와 아이는 바다 대신 호텔 수영장이지만 그 따뜻한 물을 바다 삼아 돌고래처럼 자유롭게 유영했다. 양수같이 따뜻한 물은 우리의 몸의 긴장은 물론 지친 마음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수영 하는 내내 아이를 쳐다보며 부디 아이의 앞길이 이렇게 따스하고 촉촉하기를 하는 마음이었다. 여행의 끝자락 아이에게 가장 좋았던 일을 물었더니 수영이란다. 인간은 누군가의 말처럼 바다가 고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비가 온다던 예보가 어긋나고 화창한 아침을 맞이했다. 도착해서 날씨 예보를 보니 여행일정 내내 비가 온다고 되어있어 걱정을 했는데 일정 내내 비는 오지 않았고 따스한 날씨에 봄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곳곳에 수선화가 피어 있었고 나무들은 모두 푸르렀다. 마치 온실처럼 계절 자체에 생명력이 있는 남국의 풍경이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기도 했지만 주로 버스를 이용하였다. 버스에서 본 풍경은 낯선 곳이지만 정겹고 특유의 문화가 곳곳에 박혀 있어 한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마지막날 간 사려니숲의 메타세콰이어는 소문대로 늘씬하고 촘촘하게 늘어 서 있어 포토스팟이 되어 주었다. 분명 따스한 봄날씨였던 곳을 지나 사려니숲에 닿으니 온통 눈으로 덮인 숲에서 눈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 역시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감이다. 어딘가에서 고라니를 보았다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신비한 겨울 풍경이 펼쳐졌다. 하얀 눈 사이로 검은 색에 주황무늬가 있는 새가 보였다. 후투티다. 예전에 아이가 발표를 한다고 프린트를 해달라던 새다. 눈이 없었다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흰눈은 가슴 속을 맑고 시원하게 정화시켜 주었다.
마지막 숙소는 지난 번에 갔던 커다란 말라뮤트가 있는 곳이다. 아이는 그곳에 간다는 말에 다른 숙소도 모두 거기로 하자고 한다. 그만큼 아이는 동물을 좋아한다. 다시 만나게 된 말라뮤트는 여전히 귀엽고 붙임성이 좋았다. 아이는 내내 강아지 곁에서 간식을 주며 재회를 기뻐했다.
나도 제주도를 좋아하지만 아이에 비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기억 속에 제주도는 늘 천혜의 자연을 품은 거대한 놀이터가 아니었을까. 아이는 잠시 그간 감당하기 힘들었던 스트레스를 벗어 놓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좀 더 친밀해졌고 여행동료로서 훌륭한 팀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엄마가 의지할만한 어른으로 여겨졌는지 내게 기대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지만 나와 아이는 분명 어느 정도 성장했고 우리가 넘어야할 산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훨씬 밝아졌다. 그리고 전과 달리 수시로 나를 찾아와 수다를 늘어 놓는다. 나는 안아주고 토닥여주며 아이의 힘든 마음이 오래가지 않기를 바란다. 버거운 일이 있어도 쉬어갈 숨통을 만들어 놓는다면 그 길이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제주여행은 나와 아이 둘 다에게 모험이었지만 서로 믿고 의지하면 아무리 힘든 여정도 멋진 모험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제 모험을 즐기는 법을 알았으니 어디든 함께 하고 싶어질 것이고 그 뿌듯함을 기대하며 그 어떤 길이라도 즐겁게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