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겨울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할 일이 떠오르는 아침. 무거운 몸을 일으켜 씻고 커피 한잔을 마신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지난밤 들어온 주문을 처리하며 잠을 깬다. 일을 하는 시간은 채 30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이 요동친다. 생각만큼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 고민에 빠진다. 원하는 매출이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해진다.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들. 그걸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어떤 일이든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뭔가 더 해야할 것 같은데 막막해질 때, 그럴 땐 내가 찾은 방법은 그냥 놓아버리는 것이다. 산책을 가거나 도서관 수업을 간다. 나만의 힐링을 찾아나선다. 그러다 보면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어떨 땐 티브이를 보며 휴식하다보면 다시 마음이 편안해 지기도 한다. 요즘 빠져 있는 것은 드라마 한편. 사실 드라마를 잘 보지는 않는다. 거기다 선재업고튀어라는 이상한 제목 때문에 본방때는 보지 않다가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내용을 알게 되어 흥미가 생긴 드라마이다. 시간여행이라는 소재, 운명적인 사랑, 풋풋한 시절 귀여운 남녀주인공이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첫눈에 반하고 그 사람만 보이고, 그가 아니면 안되고,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고, 끝도 없이 행복해지는 감정. 자신이 좀 더 손해를 보더라도 다가갈 수 밖에 없고 심지어 죽음을 불사하게 만드는 것. 이것은 아마도 신의 축복이 있어야 가능한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그렇게 운명을 거스르려고 했지만 남자주인공은 매번 여자주인공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 그러자 여자주인공은 인연 자체를 만들지 않고 그와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모르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을 곁에 두고 모른척한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는 그 부분을 재치있게 다룬다. 남자주인공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채 냉정한 여자주인공을 향해 관심을 두게 되고 급기야 모든 것이 기억나는 순간이 다가온다. 결국 그들을 위협하던 존재가 사라지고 그들은 사랑의 승리를 쟁취한다.
내가 정말 과거로 돌아간다면 난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며 지금 내가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떠올려 본다. 과거의 내 연애사를 돌이켜보면 단순한 흥미로 서로를 만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심지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수동적인 연애만을 경험했고 그래서 그 연애는 부담스럽고 즐겁지 않았다. 내가 만난 남자들은 모두 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고 내가 더 그들에게 잘해주길 바랐다. 그들은 아마도 연애를 하는 이유가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주고 돌봐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마치 엄마처럼 말이다. 내가 드라마에 빠져드는 것은 남자주인공이 보여주는 다정함과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현실에서와는 다르게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든다던지, 여자주인공과 함께 있고 싶어서 온갖 애교를 부리는 것과 같이 말이다. 드라마에서 빠져나와 생각하니 그런 남자는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드라마에 빠져 들 수 밖에…. 그리고 결혼을 하니 현실은 더욱 팍팍하다. 남편은 연애할 때도 나보다 수줍음이 많았던 사람이고 데이트 장소도 늘 내가 찾아보고 정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바로 들어가 주말도 없는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해야했고 어디 한번 놀러를 가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아는 데가 없고 놀줄도 몰랐던 것이다. 결혼을 하고 나니 모든 집안일은 내 차지였고 생활을 하려면 각종 공과금을 내야하고 집안일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남편이었기에 내가 할 일은 혼자 살 때보다 더 많고 버거웠다. 아이를 낳은 일은 축복이었지만 밤 10시 넘어서야 오는 남편은 씻고 잠자기에 바빴고 육아 또한 내 차지였다. 나는 금세 산후우울증에 걸렸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처럼 연애, 사랑 같은 낭만은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는 커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결혼은 환상이라는 걸 곧 알게 될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갱년기를 겪으면서 남편과 나는 좀 더 소원해 졌다. 이제는 서로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챙기고 보살피는 것조차 피곤한 것이다. 인생은 각자, 혼자라는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도 드라마같은 일이 일어날 확률이 있을까. 난 이제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이고 더 이상 낭만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럼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왜 그 어렵다는 사랑을 찾는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사랑은 무엇일까? 정말 운명적인 사랑이는게 존재하는 걸까. 지금은 고작 상대 때문에 목숨을 걸일이 없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 현실에선 사랑이 없는대신 안전한 것을 택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일어날 수 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남자주인공 선재가 사라진 대신 변우석이라는 배우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살아있는 선재인 변우석에 열광한다. 한편으로 이해가 간다. 선재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변우석은 진짜 존재하니까. 드라마에 열광하고 남자배우에 열광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웃음이 나기도 슬프기도한 현실 속에 나는 살고 있다. 드라마를 챙겨보는 아줌마 중의 한명이 나일줄이야. 그나마 드라마라도 있어서 위안을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서로를 살리기 위해 기억을 지워가며 사랑을 지키는 애틋한 이야기에 모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내 상상 속의 사랑이야기는 더 멋지지만 그걸 난 잊고 있다고 가정해본다. 웃음이 나지만 혼자 그렇게 위안을 삼아본다. 우리가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은 그런 사랑이 세상에 존재할 확률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런 사랑이 흔하다면 드라마를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단지 그렇게 하지 않을 뿐. 나 자신의 기억은 아니지만 마치 추억처럼 흐뭇한 기억을 안겨주는 드라마.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런 기억을 갖게 해준 드라마가 고맙다. 한동안은 드라마 폐인으로 남을 듯 하다. 그동안 만큼은 왠지 내가 좀 젊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