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통이라는 굉장히 평범하게 들리는 이 질환은 나의 일상생활을 모두 올스톱시켰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울렁거려 집에 있는 게 답답할 때는 남편과 함께 동네 주변을 걷곤 했는데 걷는 것, 주변 풍경을 보는 것이 통증 때문에 편안하지가 않았다. 그럴 때 우연히 마주치는 이웃들의 평온한 걸음들과 여유 있는 미소들이 부러웠다.
그럴 때마다 기도했다. 나도 아무 통증 없이 동네를 편안하게 걷는 것을 다시 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웬만한 타이레놀이나 약한 진통제로는 통증이 잘 없어지질 않으니 두통이 어느 정도 멎어 잠에 들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는 게 두려워질 때도 있었다. 왜 아픈 사람들이 희망을 못 느끼고 죽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감정도 약간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두통이 또 찾아오려 해 처방받은 진통제로 효과 없을 때 먹는 더 강력한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메슥거렸다. 이 약의 부작용은 메슥거림이 동반된다는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생처음 마일리지를 탈탈 털어 비지니스를 처음 타봤다. 승무원분들께 내가 가져온 비닐팩에 얼음을 담아주기를 부탁드렸고 그분들은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녹고 있는 나의 얼음팩을 몇 시간 주기로 갈아주셨다. 아시아나 승무원분들의 프로페셔널함에 감사해 아픈 와중에도 누워서 눈물 몇 방울이 뺨 위로 흘렸다. 두통이 시작된 뒤 냉찜질 도사가 된 나는 자면서도 찜질팩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잠을 잘 수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뒤에는 두통이 금방 나을 거라는 나의 인도인 주치의말과는 달리 통증은 쉽게 멎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간단한 약만 처방해 준 것이 아니었고 나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지금도 많이 생각나는 것들이 많다. 치즈는 두통을 유발하는 물질이 많으니 줄이라고 했고 생강차를 마시라고 권했다. 요가나 스트레칭을 자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도착하면 두통이 바로 멎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기도 그런다며 하하.
부모님 집에서 생활할 때도 아침에는 괜찮다가 오후가 되면 뒷골이 아파지는 패턴이 또 반복되었다. 그래도 미국에 있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예약을 잡아 신경외과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MRI, MRA? 인지와 뇌파검사등을 했다. 통 속에서 오랜 시간 이상한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는데 두려움이 몰려왔다. 너무나 다행히도 큰 병은 없었다. 진찰실에서 엄마와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의사는 원인은 딱히 알 수 없으며 호르몬의 변화와 유전적인 것을 이야기하며 어떠어떠한 진통제를 두 달간 처방해 주었다.
그 약을 먹으며 조금씩 증세가 나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친구도 만나러 멀리 갈 수 있는 몇 시간짜리 에너지가 생길 수 있을 것만 같아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예전처럼 많은 친구들과 약속을 잡기는 어려웠지만 조금씩 일상생활을 되찾는 것 같아 기쁨이 찾아왔다. 남편도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갈 수 있을 정도로 원래대로 회복하고 있다는 걸 멀리서 지켜보며 마음이 놓인 듯 했다. 그는 자주 말했는데 Happy wife, happy life 라는 미국인지 서양권의 말이라고 했다. 결국 우리 둘은 한국으로 이사 가보자는 무모하고 용기 있는 도전을 하기로 했다.
남편은 한국에서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더 많은 1.5세 교포고 많은 게 익숙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는 적응력이 뛰어난 편이고 사람들에게 매너 있게 구는 겸손함이 몸에 배어있으니 왠지 생각보다는 잘 지낼지도 모를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와 내게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교포들이 한국에서 일 년도 못살고 질려서 돌아간다는 통설 같은 이야기로부터 오는 두려움이 느닺없이 몰려오기도 했다.
고민끝에 남편은 한국에 있는 미국회사에 지원했고 첫 번째 인터뷰를 보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가 첫 면접을 보는 날 나는 전셋집을 계약했다. 계약일 전날밤에는 그런 걱정과 자신감이 뒤섞여 거의 뜬눈으로 잠을 잔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걸 몸으로 느꼈다.
큰 이사를 결심하면서 주변사람들 특히 한국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미국이 그립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한국보다 미국이 좋지 않냐고. 회사 다니기도 더 자유롭고 여러모로 좋지 않냐고.
만약에 나도 한국에서만 살았거나 미국에서 유학이나 여행으로만 왔다 갔으면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미국에 대한 딱히 환상도 없이 갔기 때문이었는지 그곳에 살면서 나는 한국에서의 회사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다. 자유롭다는 만큼 고용불안성이 컸고 그것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기는 떠다녔지만 많은 업무들은 한국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게 Top-down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큰 차이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리고 주거환경도 나에게는 큰 문제로 다가왔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집이 원밀리언+삼십만불정도의 집이었는데 그것이 조금 보태서 쓰러져가는 집이라는 현실이 나에게 그 집을 사서 이자를 갚으며 매달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주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살던 지역의 병원들이 문제였다. 신경외과 예약을 하려고 주변 병원을 수소문해 보았을 때 가장 빠른 날짜가 세 달 뒤라는 쌀쌀맞은 직원의 대답은 뇌에 문제가 있는 거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을 가진 환자에게는 너무나도 차갑고 냉정하게 느껴졌다. 코로나 이후 많은 의사들이 일을 그만둔 건지 의사 수는 부족했고 환자는 많은 탓이었을까. 그래서 미국, 특히 이 지역에서는 병이 다 커진 뒤 죽기 전에 의사 얼굴을 보겠다 싶었다.
어쨌든 남편이 지원한 한국에 있는 회사가 오퍼레터를 주던 안 주던 우리는 한국에 가서 살기로 했다. 젊고 팔다리 멀쩡한데 굶기야 하겠냐는 생각이었다.
계약한 뒤에 남편의 2차 인터뷰가 잡혔고 우리는 좀 더 큰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