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6년차에 접어든 어느 봄날, 짜파게티를 짭잘하게 끓이고 곁들여 먹을 삼겹살을 노릇노릇 구워 잘라 남편과 함께 우걱우걱 맛있게 먹은 날이었다. 체한 건 아닌데 머리가 끊어지듯이 아파왔다.
요즘 들어 두통이 잦은 주기로 찾아왔었다. 회사 미팅에서도 카메라에 비춘 나를 스스로 보면 무심코 검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었다.
짜파게티와 삼겹살을 먹고 생긴 두통은 타이레놀을 먹어도 들어먹질 않았다. 그리고 몇시간 뒤 변기통을 붙잡고 게워내기 시작했다. 토하고 나니 괜찮아지는가 싶더니 또 다시 머리가 너무 아파서 눕기도 힘들고 물도 못넘길 지경이 되었다.
내가 가입한 보험의 종류는 PPO였기에 아무 병원이나 갈 수 있었고 그렇게 집과 가까웠던 스탠포드 병원의 응급실을 갔다. 보호자인 남편은 들어갈 수 없고 나보고 공항 검색대처럼 금속탐지같은 것이 되는 게이트를 통과하라고 했다. 머리가 어질어질 했고 남편은 잠시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응급실 안의 대기공간에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어수선한 시장바닥 같았다. 또다시 속이 울렁울렁대서 병원 벽에 붙어있는 구토 전용봉지를 잡아빼 화장실로 향했다. 소화가 하나도 되지 않은 모양이었고 화장실에서 나와서 대기공간을 둘러보니 아직도 사람들은 그대로 많았다.
도저히 못참겠어서 울먹이며 간호사에게 못참겠다고 말하니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더니 migraine이 언제부터 시작됐냐고 물었다. 나는 headache만 알지 그 단어는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아 그게 뭐냐고 물으니 간호사는 never mind라며 내게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선 피를 뽑고 열을 재더니 타이레놀같은 약의 주사를 놔주고 타이레놀 알약을 먹으라고 한개 더 줬다.
두통은 살짝 나아지는가 싶더니 먹은 약이 속을 불편하게 했는지 다시 새 봉투를 가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몇번을 왔다갔다 하다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도대체 나는 언제 의사를 만날 수 있느냐고. 그때가 응급실에 들어간지 3시간이 지난 뒤였다. 간호사는 내게 짜증을 내며 알 수 없다고, 너 앞에 15명이 더있다고. 앞으로 2-3시간은 더 기달려야할 수도 있다며 무책임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을 보였다. 난 할 수 없이 다시 내가 앉아있던 의자로 돌아갔다.
안그래도 아픈 머리를 쥐어잡고 겨우 진정하던 중에 뒤쪽에서 불쾌한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간호사인지 인턴 학생들인지 알 수 없지만, 스탠포드 이름이 붙은 가운을 입은 젊은 직원들이 간이책상에 앉아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깔깔대며 웃어대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할 행동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의료계에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쩜 저렇게 아픈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이곳엔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새벽이었기에 겨우 잠에 들었고 일어나 속이 좀 괜찮은 듯 싶어 남편에게는 된장국을 끓여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흰 죽을 끓였다. 잘 익었나 보느라 한 입 먹어본 흰 죽 덩어리는 또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른 저녁 이후 며칠간에 걸쳐 3번이나 Kaiser 응급실을 찾아야했다. 이 병원에서도 물론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지만 간호사부터 의사까지 모두들 프로페셔널하고 감사함을 느끼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CT스캔을 찍고 다행히 아무 이상 없다는 소견을 받았고 의사는 일명 칵테일이라고 부르며 다양한 약들을 섞어 수액에 추가해주었다. 응급실을 한번 다녀오면 그날은 괜찮아졌다가 다음 날 또 아픈 것이 반복되었다.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해 남편과 함께 동네를 걸을 때면 아무 고통 없이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 당연한 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자 너무도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조금 잦아든 것은 세번째 방문때의 마지막 의사가 스테로이드 약을 처방해주고 그것을 10일치 먹은 것의 효과였다. 두통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체력이 급격하게 약해졌음을 느꼈다. 오전시간엔 걸어다닐 만 하지만 오후가되고 저녁이 다가오면 힘이들고 뒷목이 뻐근해져와 누워있으면 편해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카이저 병원에서 의사가 타 병원의 신경외과를 꼭 보라고 권유했고(카이저 멤버가 아니었기에) 예약을 하려고 전화해보니 세달 뒤에나 볼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다른 병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우리 가족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타이밍이 온 것 같다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선은 한국에 나 혼자 가서 신경외과를 찾아가 CT와 MRI검사를 자세히 해보고 두통의 원인을 찾아보고 제대로 된 처방을 받는 것이었다. 큰 병일까 두려워 걱정이 몰려올 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놈의 두통의 쉽고 빠른 해결법은 나와 남편이 함께 사는 터전을 미국에서 한국으로 옮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하곤 했다.
그렇게 난 한국의 병원을 가기 위해 회사에는 한달 가량의 병가를 내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