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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말을 거네 8

시선은 권력이다

by 능선오름


공간지각(空間知覺)이라는 단어가 있다.

쉽게 생각하면 ‘눈썰미’라는 우리 고유 단어와 같은 맥락의 단어다.

공간지각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대표적인 쓰임새가 바로 운전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공간을 지각하며, 그 공간지각력이 없었다면 당연히 멸종되었을 것이다.

모든 동물은 공간을 지각한다.

그러나 인간과는 다른 방식들로 공간을 지각한다.

원시 인류의 세계에서 공간지각력은 각개 남성들의 능력 차이가 두드러지는 부분 중 하나였다.

타고난 신체조건 중 완력과 반사신경 못지않게 중요한 능력이 공간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부부가 흔히 부딪치는 문제 중 하나는 각자 성별에 의한 공간지각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출근 전에 서랍을 열고 남편이 아내에게 소리친다.

' 내 검정 양말이 어딨어! '

고래고래 소리치는 남편을 두고 아내가 들어와서는 바로 서랍 앞에 있는 양말을 꺼내서 코앞에 흔든다.

' 앞에 있는 거 찾아보지도 않고 어린애처럼 나를 부려먹어! '

흔한 일중 하나다.

그런데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공간을 보는 시각 차이에 불과하다.

오랜 고대 인류들은 남성은 사냥을, 여성은 채취를 주로 했었다.

남성들은 지평선 멀리 떨어진 사냥감을 찾아야 하므로 멀리,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시각이 발달했고,

여성들은 가까운 장소의 열매나 식용 풀을 채취하고 아이들을 돌보다 보니 가까운 곳에 흐트러진 장소에서 목적물을 찾는 시각능력이 탁월하다.

그 오랜 유전형질 때문에 이미 남녀의 성 구별이 거의 무의미해져 가는 현대에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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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글에서 ‘프록세믹스(proxemics·근접학)’를 간단히 기술하였었다.

사람이 각자의 친밀 정도에 따라 사회적인 근접 거리를 둔다는 것 또한 공간지각에 따른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특정 공간에서 그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겠다.


이를테면 과거 현재 언제나 특정 집단에서 권력 서열이 가장 높은 자는 자신의 뒤에 누군가를 두지 않는다.

그리고 봉건시대로 갈수록 권력을 가진 자는 그 권력을 받들어야 하는 자보다 늘 높은 자리에 있었다.

자신은 굽어볼 수 있지만, 피지배자들은 감히 올려 볼 수 없는 자리.

자신은 타인들을 바라보지만, 피지배자들은 늘 지배자를 함부로 바라볼 수 없는 위치.

혹은 관을 쓴다거나 심한 경우 커튼이나 주렴 뒤에서 바라보는 행위.


이것이 현대로 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펜트하우스층을 선호하고, 공동주택에서도 최고층이 높은 가격으로 오르는 이유다.

타인은 나를 볼 수 없고 나는 타인들을 굽어볼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권력이 강하다고 느낀다.


공간과 시선은 권력이다.

공간은 필수적으로 시각을 동반해야 한다.

만약 완전한 암흑 공간 속에서 있다면 자신이 얼마나 큰, 혹은 작은 공간에 있는지 사전 정보가 없다면 알 수 없다.

물론 소리에 대한 반향 같은 것으로 짐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결정적인 공간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역시 시력이다.


그리고 시선은 일방적이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에서 공간은 시선에 의해 다시 분할된다.


7ridge2-전체_사진-37851552727.jpg 가로지르는 교량이 없다면 단지 강의 흐름이 보일 뿐이다.


개인의 영역을 중요시하는 서구인들에 반해 동양권에서는 개인 간의 공간 간격이 다소 좁다.

그것은 ‘개인’을 우선시하는 서구인들의 문화와 ‘단체’를 중요시하는 동양인들의 문화가 다른 까닭이다.

물론 문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18,19세기에도 유럽의 평민들은 비좁은 집안에 가축까지 함께 사는 구조로 주택을 짓기도 했고,

로마 제국 시대에도 로마 시내에서 돈벌이를 해야 했던 평민들은 로마 외곽에 지어진 비좁은 다층구조의 열악한 주택에서 생활했었다. 그게 '빌라'라는 단어의 시초이다.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가 권력을 가진 자이며,

이것은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 집단에서도 나타난다.

사자나 원숭이들은 무리 중 알파 수컷이 가장 높은 바위, 언덕, 나무 위에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무리의 행동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원하는 위치로 언제든 시선을 옮길 수 있다.


전근대적 회사 사무실이나 공장에서도 늘 타인들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는 가장 큰 권력을 쥐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배받는 사람들에 비교하여 훨씬 쾌적하고 넓은, 퍼스널 스페이스가 충분한 공간을 장악했었다.


이러한 시선의 권력, 공간의 권력을 극단적으로 구상했었던 건물이 있었다.


영국의 법학자·철학자이자, 변호사였던 제러미 벤담(영어: Jeremy Bentham /ˈbɛnθəm/ , 1748년 2월 15일 ~ 1832년 6월 6일)이다.

벤담은 1785년에서 1788년 사이 유럽 곳곳을 여행하고 당시 러시아에서 일하던 동생 새뮤얼 벤담을 만나기 위해 러시아로 갔는데 그때 파놉티콘의 최초 구상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시설을 고안하던 중 파놉티콘의 개념을 감옥으로 확장한 것이다.

1786년 벤담은 파놉티콘의 개념을 담은 21통의 편지를 썼고 나중에 더블린의 출판사에서 한 권의 책으로 간행되었다.

1791년 벤담은 영국에서 단행본 출판과 거의 동시에 프랑스 의회에 파놉티콘을 제안하고 프랑스 의회는 제안서를 인쇄하는 등 거의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루이 16세가 실각하고 그의 제안은 폐기되었다.

이게 얼마나 비인간적인 구조인가를 생각한다면 그의 제안이 폐기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꼭 파놉티콘 같은 구조는 아니어도 관리자의 시선이 노동자를 감시하는 행태는 각기 다른 형태로 유지되어왔다.

80년대 구로공단의 대기업 생산라인에서는 컨베이어 벨트의 노동자 위치마다 은행의 대기 번호판 같은 디지털 알림 번호판이 있었다.

그건 개별 노동자 앞에 처리해야 할 제품들이 얼마나 많이 머물고 있는지를 카운팅 하는 구조였다.

각 라인의 반장은 멀리서도 어떤 노동자가 굼뜨게 일처리를 하는지 한눈에 파악하고 욕을 하곤 했다.

현재는 기업의 내부 시스템을 통해 출퇴근과 함께 근로자가 무슨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 데이터를 집계할 수 있을 정도로 감시체계가 스마트화 되어있으니 현대의 판옵티콘은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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