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적인 중국 고대 주택
왕궁이나 사찰은 그렇지 않은데 왜 서민주택은 거의 3천 년 전부터 이토록 폐쇄적인 구조로 계획되었을까?
중국이 진나라 때 최초로 단일 국가 형태로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왕조가 바뀌고 국가가 바뀌고 통치 민족이 바뀌었었다.
수시로 비적들이 나타나고 일반 백성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던 시기들을 따져보면 그리 평온한 기간들이 많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진 백성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집을 스스로 지켜야 했던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사합원(四合院)은 사합방(四合房)이라고도 하며, 한족 전통 합원식 건축 양식의 하나다. 소위 '사합원(四合院)' 이란 그 가옥 형태가 북방(正房), 남방(倒座房) 그리고 동서의 상방(厢房)이 사면을 둘러싸면서 네모형을 형성하고, 그 중간에 정원을 두는 형태로, 이러한 원락을 사합원이라 부른다.
사합원은 중국에서 상당히 오랜 역사가 있다.
그 연원(淵源)은 약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북부 산시(陝西) 성 서주(西周·BC 1046~771년) 시대 유적지에서 일찌감치 그 흔적이 발견된,
유래가 가장 오래된 주택이다.
중국 전통 주택의 특징은 공격과 방어를 전제로 한 높은 담,
타인의 출입을 함부로 허용치 않을 듯한 견고하면서도 작은 문,
건물의 구조가 모두 안쪽을 향하는 내향성(內向性) 등이다.
사합원은 이런 중국 전통 주택의 모든 특징이 가장 완벽하게 일상적으로 자리 잡은 집이다.
벽돌로 아주 두꺼운 담을 쌓아 내부와 외부를 분명하게 갈랐다.
대문은 남북으로 난 종향(縱向) 구조의 정면에 문을 낸 때도 있지만,
대개 동남쪽 한구석에 조그맣게 문을 냈다.
그 문을 들어서도 내부는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토루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그 배경은 좀 다르다.
중국 푸젠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보이는 주거 형태이다. 원주민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 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2008년, 유네스코에 의해 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객가’란 누구일까.
중국 대륙에서는 대규모 유민 流民이 다섯 차례 발생했다.
전부 북에서 남으로의 이동이었다.
1차는 한나라가 멸망한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였고,
2차는 당나라가 기울면서 안사의 난, 황소의 난에 이어진 오대십국의 혼란기였다.
3차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이 차례로 남하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킨 시기, 4차는 명말 혼란기, 5차는 청말 태평천국의 난이 대륙을 휩쓸던 시기다.
유민은 하나의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는 극도의 혼란기에 발생한다.
총체적인 혼란은 엄청난 인명 손실을 수반하게 되고, 최후의 승자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비로소 진정되는 게 하나의 순환이다.
이런 혼란기에 백성들은 극심한 전란을 피해 농토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힘겹게 피난했으니 이들이 객가 인의 선조다.
객가 인들은 생존과 생산, 이주와 전쟁 모두 혈족이 단결하여 헤쳐왔기 때문에 대가족 또는 군사 문화적 요소가 강했다.
물론 객가 인들이 연고도 없는 산지로 들어가 농토를 개간하고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현지인에게는 침략이었고, 느닷없이 굴러 들어온 재앙이었다.
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이 이어졌고,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도적 떼가 되어 기습과 약탈로 연명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살림집, 한 마을이 모두 한 집에 모여 사는 집이 바로 토루다.
객가 인들은 외지에 나가서 새로운 삶을 펼치는 것이 몸에 배었는지 타이완이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로, 또다시 미주와 유럽에 이민을 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태양이 있는 어디에나 객가인 이 있고, 땅 한쪽만 있으면 어디나 객가인 마을이 있다고 한다. 바로 화교들이다.
사합원은 가족 단위 주택이고, 토루는 현대의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이다.
구성 방식도 다르고 공간의 구조도 다르다.
한 가지 공통점은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는 폐쇄된 구조라는 것이다.
중세 때 유럽에 왕조가 있었어도 지역의 영주들끼리 분쟁이 심했고,
그 시기에 많은 유럽의 성들이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정치와 경제가 건축 양식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외부에 폐쇄적인 건축들은 전투에 필요한 용도로 만들어졌으므로 높고 견고하다.
그리고 내부에서는 포위 기간에 오랫동안 버텨내야 했으므로 식수가 필수조건이었으며 내부 공간 구조도 지극히 군대식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단체 생활을 해야 했으므로 당연히 따르는 불편함이다.
어쩌면 중국 대륙을 떠나 머나먼 미지의 땅,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던 객가인 들은 그처럼 제한적이고 폐쇄적인 공간들을 못 견뎌 한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개인에게 필요한 공간이란, 최소한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기 싫어하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사람 사이의 공간감각, 거리 감각을 설명하는 ‘프록세믹스(proxemics·근접학)’라는 개념으로 공간 사용 방식에 관한 연구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신체 접촉이 허용되는지 여부나 몸의 열기, 냄새, 시선, 목소리 등을 연결시켜 인간관계와 거리 사용 방식을 설명한 바 있다.
사람들 사이에 적정한 거리 감각이 작동되지 않을 때 인간관계는 불편해지고 의사소통은 원활하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