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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Feb 22. 2024

남편의 직업은 생명을 살리는 수의사

운*동지구대 지구대장

"어제 사자 진료하는 꿈 꿨잖아. 너무 무서워서 보호자한테 꼭 잡아 달라고 했거든. 겨우 다가갔는데 갑자기 사자가 입을 쫙! 너어무 무서워서 깼잖아!"


아침에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다가 마침 기억이 났다는 얼굴로 남편이 말했다. 정말 겁이 났었는지 손으로 막는 포즈까지 취하며 꿈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하회탈처럼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진실하고 밝아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자 앞에 생쥐 같았을 남편의 모습이 카툰의 한 장면 같아 깔깔거리고 웃었다.


남편은 소동물 수의사다.


다시 말해 사자나 호랑이 독수리 같은 야생 동물은 진료실에서 마주할 일이 없고 소나 돼지, 말 같은 대동물 역시 진료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꿈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겁이 많은 남편에게는 앙칼진 고양이도 사자처럼 두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집고양이라도 고양이는 타인에게 경계심이 많고 자신을 아프게 할 수의사에게 다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무리 능숙한 수의사라도 경계하는 고양이의 공격을 피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남편의 팔뚝과 손에는 고양이의 날카로운 발톱에 찢긴 상처가 있다. 물론 고양이만 사납겠는가. 재작년에 20kg이 넘는 웰시코기 녀석에서 손을 물렸는데 빼려고 하면 개의 특성상 더 세게 물고 안 놓기 때문에 물린 채 입을 벌릴 때까지 가만있었다고 한다. 엄지 손가락과 검지 사이에 구멍이 뽕 하고 나서 같이 큰 병원에 갔는데 너무 안쓰러웠다. 상처의 위험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동물에게 물리면 세균이 밖으로 나와야 해서 스스로 아물 때까지 봉합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상처도 더 더디게 낫고 통증도 심하다. 성난 개에게 물리고도 손을 빼지 못하고 꾹 참고 기다렸을 남편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럴 때, 남편이 수의사 친구들과 하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너도 나도 물렸다고 경쟁하듯 얘기하는 와중에 대동물 수의사를 하는 동창이 소를 치료하다 뒷발에 차여서 나뒹굴어졌다고 해서 남편의 표정이 겸허해졌다. 그때도 남편은 소나 말은 역시 "너어무" 무섭다고 해맑게 웃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 수의사는 모두 아픈 동물을 치료하는 줄 알았다. 프랜차이즈 뷔페에서 처음 본 그는 원숭이 캐릭터가 크게 그려진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역시 전문직이라 복장이 자유롭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누구나 알법한 제약회사의 연구원이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수의사 면허증을 따면 소동물이나 대동물, 야생동물을 치료하는 임상수의사가 되기도 하고 수의 공무원이나 제약회사나 병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한다는 것을 남편을 만나고 알았다.


그 당시 남편은 신약을 개발하고 독성을 연구하는 일을 했는데, 수의사이기에 동물실험을 피할 수 없었다. 인간을 위한 약물 개발 실험에 이용되는 쥐와 같은 동물들은 연구의 목적이 끝나면 안락사시켜야 한다. 남편은 동물들을 실험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너무 싫어했다. 주말이면 실험동물들을 관리해야 해서 한 달에 몇 번씩 연구원들끼리 돌아가며 특근을 했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밥을 많이 주고 왔다며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왔다. 남편은 덜 고통스럽게 죽이고, 있는 동안 배불리 먹게 해주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이 동물을 죽이는 일을 그만하고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그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그는 다시 인턴부터 시작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반려견 짜구의 산책을 시켜준다. 진료 수의사로 일하는 남편은 오후 출근이기 때문에 우리의 오전은 여유롭다. 오전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언제나 함께 산책을 하고 저녁에는 남편이 일을 하는 날이면 나와 아들이 함께 나간다. 우리가 산책을 할 때, 짜구의 오줌똥을 치우고 '노즈워크'(온 동네 냄새를 킁킁 거리며 맡으며 다니는 것)를 시켜 주는 것 이외에 중요 업무가 하나 더 있다. 산책을 할 때 발견되는 지렁이를 구조하는 일이다. 비가 올 것 같은 날 전 후로 보도블록으로 숨을 쉬려고 나오는 지렁이들을 다시 흙으로 던져 주는 일이다. 이 불쌍하고 무해한 녀석들은 눈이 없어서 아스팔트 길이든 벽돌 길이든 죽을 줄도 모르고 꿈틀꿈틀 기어 나온다. 그러다 햇빛에 말라죽기도 하고 자전거에 치여 죽기도 하고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주기도 한다. 우리는 얇고 뾰족한 나뭇가지나 큰 나뭇잎 장비를 손에 들고 가는 걸음걸음 꿈틀거리는 왕지락 녀석들을 흙으로 던져 준다. 벌써 5년이 넘었는데 우리 팀을 '운*동지 구대'(운*동 지렁이구조대)라고 명명하고 공식 활동을 하고 있다. 원래는 날렵하고 지렁이를 무서워하지 않는 아들이 대장이었으나 짜구 산책을 자주 빠지는 통에 남편이 지구대장이 되었다가, 지금은 남편마저 허리가 아파 활동량이 미미 하여 지렁이를 제일 무서워하는 내가 지구대장이 되었다.  


결혼을 하면 우리는 어떻게 지낼까? 10년이 지나도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연애 때와 신혼 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빨리 시간이 가서 그런 불안 없이 편해지길 바랐다.


우리는 매일 동네 개천과 공원, 번화가 여기저기를 산책하며 농담 따먹기로 깔깔거리고 봄여름가을이면 길바닥의 지렁이를 구하고 새롭게 또는 매해 마주하는 동물이나 곤충을 보면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어 아들에게 보여준다. 얼마 전에는 밤산책 중에 짜구가 몸을 낮추고 달려들어 목줄을 단단히 잡고 그의 시선을 향해 보니 개구리가 있었다. 입춘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추운 날씨인데 너무 일찍 일어난 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폴짝 산책길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남편과 나는 두꺼비를 좋아하는데 크기가 너무 커서 두꺼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뛰는 폼이 개구리가 확실했다. (두꺼비는 점프하지 않는다.) 산책 내내 개구리와 두꺼비를 생각하며 우린 신이 났다. 우리는 매일매일 자연의 변화를 함께 느끼고 알아주고 감탄하고 할 수 있는 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작은 성의를 보탠다.


 남편직업이 생명을 살리수의사라는 것이 좋다. 그에 앞서 그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어 좋다. 나와같이 지렁이를 구하고 어기적거리는 두꺼비와 뒤뚱뒤뚱 오리를 좋아하는 것이 다행이다. 나는 그와 있으면 단조롭고 조용하지만 신나고 따뜻하다.


(오늘 폭설로 아름다운 산책 풍경. 짜구의 꼬리가 살랑거림)
(지난 여름 밤산책에서 만난 왕꺼비. 올해 여름에도 또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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