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li Whale Mar 21. 2024

찐따여도 괜찮아

남편과 나는 서로에게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300개쯤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주 4일제 놀새부부이기 때문에 남들이 열심히 일하는 평일에 한적한 관악산둘레길을 노부부처럼 천천히 걸었다. 최근 키가 많이 커버린 아들이 원숭이라는 별명에서 원숭이 신사로 승급했는데 그에 반해 키는 여전히 작고 흰머리도 듬성듬성 생긴 남편은 몽땅할매가 되었다. 남편의 피부는 매우 얇고 하얘서 잔주름이 많아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가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남편의 새로운 별명을 부르며 산길을 걷는데 너무 즐거웠다.


나는 좀스럽고 쉽게 화를 내는 성격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많고 남편은 작은 키에 관찰력이 매우 떨어지는 특징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많다. 사실 그때그때 어떤 특징이 없어도 아무렇게나 놀리고 즐거워하는 일도 태반이다.

너무 훌륭한 두봉주교님 (유퀴즈 139회)

어느  유퀴즈에 두봉 주교님이 나와 자신이 어릴 적에 전쟁을 겪으며 너무  먹어서 키가  컸다는 얘기를 하셨다.  증거로 형제들은 매우  , 그리고 자신의 팔길이가 키에 비해 매우  점이 이유라고 했다. 팔길이와 키는 보통 비례하는데, 주교님은 전쟁때문에 어릴 때 잘 못먹어 실제  키만큼 크지 못해 에 비해 길다는 것이다.   얘기를 듣고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의 팔길이를 줄자로  보았다. 팔이 짧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키도 충분히 작았기 때문에 그래도 마음 한편에 혹시   건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남편은 키에 비해 팔길이가  짧았다!  말인 , 남편은 실제   있는 것보다  컸던 것이다. 그날부터 남편은 키는 작지만 '과성장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  


나보다 키가 작은 남편과 연애를 하면서 처음에는 신경이 쓰일 때도 있었다. 남편은 키도 작은데 손도 작고 팔도 짧아 혹시 선천적으로 병이 있는 건 아닌가 진짜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남친인 남편에게 물었는데 남편의 한마디가 나를 빵 터지게 하였다.


왜소증은 팔이 길어! 난 짧잖아!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에 자신의 짧은 팔을 쭉 펴며 해맑게 웃는 남편이 너무 귀여웠다. 그는 자격지심이 없고 열등감이 있어도 그것을 숨기고 괴로워하지 않았다. 작은 키나 가난했던 집안 환경에 열등감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나는 그런 그가 참 커 보였다. 내가 깔깔거리고 남편을 놀려도 남편은 언제나 활짝 웃는다. 자신도 이번에 과성장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며 아마도 중학교 때 우유를 많이 먹은 덕인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키 때문에 자신을 싫어하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불편해하지도 않지만, 내가 그를 키 때문에 안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내가 하는 놀림과 짖꿎은 별명에도 끄떡없다.  


물론 나만 그를 놀리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나의 오랜 별명 중에 "찐따"가 있는데 이는 남편이 나의 돈에 좀스러운 면을 놀리기 위해 붙인 별명이다. 나는 돈을 아낄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좋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실천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면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가능한 숨기고 집에 오면 마음껏 펼쳐 보이는데 그런 습성 때문에 집에서 별명이 여러 개 붙어 있다.  


한 번은 경기도에 사는 내가 큰 맘먹고 서울 장충동까지 애정하는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다. 나는 남편과 물냉면 하나에 면사리 하나, 만두 한 접시를 시켰다. 다른 사람들이랑 올 때는 한 번도 사리를 시켜 본 적이 없었으나 남편이랑 왔으니 비용을 좀 줄여볼 생각으로 사리를 시킨 것이다. 나는 의례 면사리를 시키면 고명만 빠진  면사리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래도 만두를 시켰으니 상도덕을 어기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식탁 위에는 냉면 하나와 오직 면만 있는 냉면사발이 놓여있었다. 남편은 이미 한차례 당황한 후, 놀라는 나를 '그럼 그렇지 너 찐따!'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심해서 육수를 더 달라고 말도 못 하고 나는 남편과 육수를 반씩 나눠 먹으며 오래간만에 필동면옥의 물냉면을 먹는 기쁨에 초를 치고 말았다. 그 뒤로도 내가 다른 냉면 집에 가서 면사리 하나 시킬까 하고 넌지시 물어보면, 남편이 나를 손짓으로 불러 조용히 속삭인다.


찐따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너 찡빠오!


난 그 얘기를 들으면 너무 웃겨서 깔깔 거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말로만 들으면 싸움이 날 수 있는 표현이지만 남편의 비언어적인 표현 안에는 그런 나를 비난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면사리를 볼 때마다 장충동 필동면옥까지 가서 육수 없는 면사리를 먹고 온 나와 그 경험을 웃기는 에피소드로 함께한 남편이 있다.


그게 무슨 말이든 우리는 안다. 찐따든 짜리몽땅할매든 쫌팽이든 과성장의 아이콘이든 무엇으로 표현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전 09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사랑이나 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