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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Mar 28. 2024

수류탄에 안전핀

평일에는 놀새지만 우리 부부는 주말에 바쁘다. 나는 토요일에 종일 일하고 남편은 일요일에 종일 일한다. 토요일에는 주중에 일하거나 학교에 가야해서 상담실에 오지 못했던 내담자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가장 일이 많다. 남편이 일하는 동물병원처럼 수의사가 여럿 있는 곳은 주7일 쉬는 날 없이 운영을 하니 다른 동물병원이 주로 쉬는 일요일에 또 가장 바쁘다. 


토요일에는 남편이 주로 아들 점심도 챙겨주고 돌봐주는 역할을 5년 이상 했는데 이제 초등 고학년인 아들은 저녁까지도 혼자 거뜬히 있을 수 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얼마 전에 남편이 오랜만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토요일 이른 저녁부터 집을 비우게 되었다. 몇주전에 예약된 1년에 몇번 없는 남편의 사회활동이기에 나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남편이 사실상 집을 비우는 일이 거의 없는데 징크스처럼 남편이 없으면 집안에 환란이 일어나곤 한다. 이것이 바로 가장의 무게인건가?  


그 날은 친정아빠가 오후에 사전 예고 없이 당일 방문을 하겠다고 하셨는데 오신다고 하는걸 단칼에 자르지 못했다. 토요일은 종일 상담을 하면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은 그로기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토요일 저녁 방문은 누구든 반갑지 않다. 또 아빠가 오신다고 하면 밥도 새로 해야하고 좋아하시는 생선을 굽거나 국과 찌개를 끓여야한다는 생각에 밥에 대한 부담이 크다. 며칠 전에라도 말을 했으면 아침이나 전날 미리 찬거리를 준비하고 밥만 지으면 되는데 오후에 얘기하니 준비도 미리 해놓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천군만마같은 남편이 놀러를 나가니 그 모든 과정을 혼자 해야하고 산더미 같은 설겆이도 내가 해야할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났다. 사실 그래도 오시라고 한 것은 나였지만 아빠는 왜 미리미리 말을 하고 오지 않는지, 그러면 남편의 약속을 조율하거나 아빠와의 약속을 다른 날로 조정할수 있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계속 들었다. 


아빠의 캐릭터는 자기중심적이고 약속을 잘 안지키며 말씀이 아주 많다. MMPI (다면적 인성검사) 식으로 말한다면 긍정적이고 불안은 높지 않으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상대를 통제하려하지는 않으나 관계에서 책임감이 낮고 매우 회피적이다. 그로인해 배우자인 나의 엄마와 결혼 생활 내내 격렬히 싸우셨다. 정확히 엄마는 맹렬히 화를 냈고 아빠는 끊임없이 도망갔다. 아빠는 아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엄마는 동의하지 않는 정도의 책임감만 고집스럽게 지키며 사셨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아빠는 학비를 내주시고 딸 셋을 분당에서 잠실까지 아빠의 작고 불편한 다마스로 거의 매일 아침마다 데려다 주셨다. 하지만 엄마에게 생활비를 거의 갖다주지 않으시고 집에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친구들과 낚시를 가거나 돌을 줍고 자전거를 타러 다니셨다. 그래도 막내딸인 나는 아빠와 좋은 추억이 많이 있고, 아빠가 오시면 잘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아빠는 6시에 약속하면 8시에 오시고 언제오실거냐고 물어보면 날짜를 정하지 않고 언제나 '그날 봐서 연락할게'라고 하신다. 극강의 TJ인 나에게는 (검사 해보지는 않았지만 해본다면 분명) FP일 아빠의 성격이 너무나 안 맞는다. 


그날도 저녁에 오신다고 하신 분이 일을 끝내고 집에 가니 아파트 야외 벤치에 앉아계셨다. 분명 내가 언제끝나니 몇시쯤에 오시라고 얘기를 했는데 매번 늦게 오시다 오늘은 유독 일찍와서 집에 못들어가고 기다리신 듯 했다. 아직 쌀도 안씻어놨는데 그 모습을 보니 답답하고 화가났다. 



아빠를 보자마자 왜 미리미리 얘기를 안하고 오느냐, 약속 시간은 왜 매번 안지키냐, 나도 일이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오겠다고 하면 어떡하냐며 잔소리가 쏟아졌다. 기다리다 이제야 딸을 만난 아빠도 "먹는 밥에 숫가락만 놓으면 되는데" 왠 생색이냐며 화를 내셨다. 그렇게 서로 자기 할 만한 하다 화가 난 아빠가 그대로 돌아가버리셨다. 착하고 순한 딸과는 거리가 먼 나 역시 그럼 가든가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용한 집에 혼자 들어오니 현타가 왔다. 좀 참으면 됐는데 한번 불이 붙고 상대가 같이 화를 내면 나는 끝을 본다. 남편이 붙여준 내 별명 중에 '수류탄'이 있는데 던지면 바로 터지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보다 인내의 역치가 낮고, 쉽게 화가 나고 화가 나면 그만큼 낸다. 다행히 공세적인 공격성은 낮지만 관대함도 낮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를 입히면 결코 참지 않는다. 밟지 않으면 터지지 않지만 밟으면 터지고야 마는 지뢰같다. 사실 이런 나를 아무도 건들지 않는데 가족들 만이 그 바운더리를 만날 때 마다 밟는다. 그리고 그 수류탄이 던져져도 터지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남편이 아주 잘한다. 남편은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분위기가 안좋아질 것 같으면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거나 옆에서 화재를 돌린다. 남편의 표정안에 '워워'하는 소리가 마음으로도 들리고 실제 내 귀에 대고 속삭이기도 한다. 나의 화났던 일에 대한 복기의 전과정을 짜구 산책 때 오롯이 들어주고 '그래 그래 나는 알지'라고 입에 발린 말이라도 언제나 호응해준다.  나의 저질체력의 한계를 잘 알고 설겆이와 뒷정리를 착착 도와주고 나 대신 아빠의 끝없는 수다도 들어준다. 그래서 남편은 나의 안전핀이다.   


남편이 약속을 마치고 돌아와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니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면 한 마디 했다. 


"과해. 그냥 조금 참지 그랬어. 멀리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러니까 너가 집에 없어서 그렇지. 수류탄에 안전핀이 빠지니까 터지잖아."

"하여간 너 찡빠오!"

"집안에 가장이 없으면 환란이 일어나지! 앞으로 가장은 매일 집을 지켜라!"


분노의 속도와 사과의 속도가 빠른 나는 아빠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기껏 대중교통으로 힘들게 오셨는데 짜증을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음에는 꼭 일주일 전에는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도 아빠가 오면 맛있게 새 밥을 지어서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주고 싶은데 갑자기 오면 당황스럽고 힘들다고 말이다. 아빠도 괜찮다면 나의 사과를 쿨하게 받아주었다.  물론 그 후로도 아빠는 6시에 오겠다고 하고 여전히 8시에나 오고 다음주에 온다고 하고 그게 언제인지는 말을 안하신다. 정말 나랑은 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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