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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Apr 11. 2024

상냥한 그의 각서

- 오빠 심심한데 나 좀 데리러 오면 안 돼?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사야 할 식료품들이 있었다. 집에서 두 정거장 전에 마트가 있어 장을 보면 혼자 2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센터 건물 주차장이 유료라  남편의 휴일인 토요일에는 그가 나를 센터까지 차로 데려다주고 퇴근할 때는 혼자 버스를 타는 것이 무언의 약속이었다.


- 어어 왜 이러시나.  

- 마트에서 살게 있어서. 마트에서 만나서 같이 가자~

- 내가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인 줄 아나 보지?

- 응. 약속했잖아. 심심할 때 놀아준다고.


그랬다. 남편은 내가 심심할 때 놀아준다고 2022년에 각서를 썼다.


나는 결혼을 하고 한 달 만에 임신을 해서 이듬해 지금의 원숭이신사를 낳았다. 남편의 강한 바람으로 우리는 둘째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원숭이신사가 크면서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매년 나를 흔들었다. 첫째를 낳고 5년간은 혹시라도 둘째가 생길까 육아용품을 이고 지고 살았다. 절대 싫다는 남편을 설득해 잠깐이지만 병원에도 혼자 가보고 배란일도 맞춰가며 임신을 준비했던 때도 있었다. 남편이 망해가던 동물병원을 떠나지 못해 잡혀있을 때인데,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 노력을 해보지도 않고 다시 각성한 남편이 나를 설득했고 나는 결국 포기했다. 그렇게 육아용품을 모두 버리거나 드림했다. 하지만 둘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원숭이 신사가 힘들기도 했지만 출산을 해서 아이만 키웠던 그 2년이 나는 너무 행복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리워 눈물이 날 것 같다. 원숭이 신사는 사내아이라 엄마의 말 따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자동 무시 시스템을 탑재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어린 아들에게 "엄마가 쓰러져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이  "묻어야지."라고 해서 나를 경악케 하였다. 자식이 부모에게 정서적 지원을 해줄 책임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엄마에게 딸 셋이 있듯 나에게도 그 정도의 딸이 한 명이라도 있기를 꿈꿨다. 그리고 원숭이 신사에게는 그 기대를 품을 수 없었다. 이기적인 바람이라서 답이 없었는지 실제 철저한 피임으로 우리는 자식이 하나다.  


그렇게 재작년에는 나의 징징 거리는 연중행사에 남편이 각서를 써줬다.


"나는 평생 반려자 **가 심심하고 외로울  대화상대도 해주고 비난 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각서를 사진 찍어 즐겨찾기에 넣어놓고 미래의 보험처럼 간직했다. 외로울 때, 질보다 양으로 나와 함께 해주겠다는 그의 약속은 꽤 위안이 되었다. 남편은 '자식은 크면 남이다, 자식한테 아무것도 기대하면 안 된다, 늙어서는 우리 둘 뿐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나를 설득했다. 그러니 자신이 그 오징어 땅콩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각서를 캡처해서 보냈다.


- 넌 나의 오징어 땅콩이지.

- ㅠㅠ


남편과 연애할 때 그가 나를 사로잡았던 두 가지가 있었다.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길래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하니 천만다행이라는 얼굴로 "싫어하지만 않으면 됩니다!"라고 말한 그의 긍정적인 성격과, 얼토당치 않은 말이라도 자신이 뱉은 말은 지키는 신뢰였다.


싫지만 않으면 된다고 해서 사귀기로 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그가 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들어드릴게요."

"집이라도 사달라고 하면 어쩌려고요?"

"하하하하하하 그건 좀. 다른 거?"


나는 허튼 말하는 사람을 정말 싫어하는데 그가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당해보라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럼 금괴하나 주시죠. "

"아. 금괴요?"


그는 집에서 소 두 마리를  애지중지 키우는 농부의 4남매 중 셋째로 그 당시에도 후배와 함께 하우스를 셰어하고 있었다. 그의 봉고차 윗뚜껑 만한 방은 싱글 침대 하나와 텔레비전을 품은 작은 협탁 하나로 꽉 찼다. 그런 그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금괴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자신이 경솔했다고 사과를 한다면 그래도 본전을 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한 주 후에 그는 정말 금괴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영화에서 보는 그런 거대한 금괴는 아니었고, 보석함에 부루마블 주사위 크기의 한 돈짜리 순금이 보증서와 함께 들어있었다. 그래도 분명한 금괴였다. 나는 헛웃음이 났다.


'바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행동은 분명 임팩트가 있었다. 자신이 한 말은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3.75 톤의 무게로 나에게 전해졌다.


결혼하고 그의 짐을 정리하면서 그의 별거 적혀있지 않은 다이어리를 봤다. 거기에는  종이가 빵꾸 날 정도로 여러 차례 반복해서 쓰고 동그라미를 치며 고민한 글자가 있었다. '196만 원'.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가 나에게 준 금괴의 가격이었다. '12개월 무이자 할부'.라고 옆에 적혀 있는 것을 보니 매월 163,333원을 1년간 냈겠구나 싶었다. 어찌나 진하고 수차례 쓰고 또 썼는지 그의 깊은 고민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금괴는 후에 우리의 결혼을 기꺼워하지 않던 엄마에게 뇌물로 전해졌다. 미국에서 교수가 되리라 믿었던  딸이 자신보다 작고 엄마 생각에 못생긴 남자와 결혼하려고 한국에 눌러 앉겠다니 힘없는 반대로 나를 말렸다. 그는 그랬다. 한 말을 지켰다.


그 뒤로도 남편은 기분 좋은 선심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수차례 무서운 약속을 했다. 집요한 나는 그의 약속을 차곡차곡 모아 마음 속에 새기고 줄지 않는 통장 잔고처럼 보고 또 보며 행복하다.


상냥한 그의 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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