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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Apr 18. 2024

사랑은 언제나 신나?

우리 집에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원숭이 한 마리가 있다.

청소년이 되면서 날 행복하게 하는 슈퍼파워를 잃고 불행하게 만드는 귀신같은 재주를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지지 않겠다!


아들은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데 작년부터 자기 전에 감사일기를 쓴다. 그냥은 할 리가 없어  3가지 감사를 쓰면 카드 세 판을 쳐주기로 했다. 남편이 10시에 일이 끝나 집에 오면 10시 30분쯤이 되는데 남편은 재킷도 벗지 못하고 식탁에 앉아 훌라(트럼프 카드로 하는 놀이로 같은 숫자나, 연이은 숫자를 내려서 가진 카드를 모두 내리면 이기는 게임)를 친다. 마지막에 꼴찌한 사람이 카드 정리를 하기 때문에 1분이라도 빠른 퇴근을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나는 원래는 9시에 육아 퇴근을 하고 안방 침대에 누워 비로소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는데 아들의 귀가 시간이 늦어짐에 따라 나의 육퇴시간도 늦어져 10시가 넘어서야 쉴 수 있다. 하지만 누운 자리가 뜨끈해질 틈도 없이 나는 훌라를 치러 식탁에 앉는다.


어제는 진짜 너무 피곤했다. 원래는 상담이 있는 날이지만, 사례가 없어 앗싸 하는 기분으로 집에서 장기간 미뤄놨던 장편소설을 이어 썼다. 하지만 집이란 공간이 그렇다. 뭐 좀 하려고 하면 택배 오고, 또 앉으면 입이 심심하고, 커피 마시다 먼지가 보이면 청소하고, 이제 써야지 하면 아들이 온다. 거기에 시어머니가 박스로 보내주신 파릇파릇한 봄나물을 씻어 데치고 삶고 무치느라 저녁 내내 쉴틈이 없었다. 아들이 학원에 수차례 늦어서 오자 마자 푸닥거리를 한 번 했다. 학원 숙제를 하는 것을 집에서 본 적이 없는데 알고 보니 수영장에 갔다가 거기서 숙제를 하느라 다음에 이어진 수학학원에 늦는 것이었다. 아들은 나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며칠 전 사놓은 연어를 굽고 계란찜을 만들어 함께 먹었다. 요새 청소년이라 그런지 황소개구리처럼 와구와구 잘 먹는다. 그건 참 예쁘다. 식사 중에 학교 생활을 물으니 괴물딱지 같은 녀석과 복도에서 치고받고 싸운 얘기를 해주었다. 아주 크게 머리를 다칠 뻔했지만 자신의 민첩한 낙법으로 하나도 다치지 않았단다. 걔가 먼저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며 아직도 분이 다 안 풀린 것 같았다. 한숨이 나왔다. 난 세 자매 중에 막내라 학교에서 치고받고 싸운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우리 아들은 자주 해준다. 다행히 선생님께 전화가 안 온 것을 보면 그리 큰 사고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밥을 먹고 수영복을 욕실에 정리해 놓으라고 하니 가방을 안 들고 왔단다. 다행히 수학학원에서 눈치채고 수영장에 전화를 하니 잘 보관 중이란다. 울화통이 치밀었다. 나만! 우리 아들은 '그게 뭐? 어쩔?' 하는 표정이다. (작년에 아들때문에 열폭해서 쓴 분노시리즈가 있다. "안녕 나의 선샤인" - 05. 화가나서미치겠어요. https://brunch.co.kr/@highnoon2022/10 참조)    


엊그제는 컴퓨터로 단원 평가를 봤는데 걷어갈 때 자신이 OMR 카드를 밀려썼다는 것을 알았고 다행히도 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다시 옮겨 쓰도록 시간을 주셨다고 감사일기에 적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물어보니, 시험은 20분 만에 검토까지 마치고 시간이 남아 최근 몰입해 있는 해리포터 불사조기사단을 봤단다. 다른 친구들도 다 그랬다고 한다. 나의 논리는 소설책 볼 시간이 있었으면 OMR카드도 점검을 했어야 하지 않냐이고,  아들은 한 번 검토를 했으면 됐지 남은 시간 내내 어떻게 이미 본 시험지를 반복해서 점검하느냐는 것이었다. 아... 말이 안 통한다. 비난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하길 바란다고 마무리는 했지만, 엄마는 자신을 비난했다고 째려보며 말했다.


"내 일인데 왜 엄마가 화내?"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 내 일이 아닌 너의 일인데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나?  

나의 메시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 문제는 전달방식이다. 사실 아들의 꼼꼼하지 못한 성격에 대해 10년 넘게 얘기를 하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들에게 단일 사건이 나에게는 연쇄사건의 일부라 과거 감정이 붙는다. 분노와 억울함. 내가 아들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으면 사람들은 결국 엄마가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고 쉽게  말한다. 지랄 맞은 완벽주의자에 극강의 TJ인 나는 아주 반복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편이지만, 와... 이 녀석은 난공불락이다. 하지만 핑계다. 사실 내 일이 아니고, 교육의 의무는 있지만 강요할 권리는 없다. 억울한 것은 남들의 평가때문이지 나도 그도 잘못하지 않았다. 화낼 일이 아닌데, 그의 아직 있지 않은 실패를 마치 지금 있을 일 처럼 그리고 나의 일처럼 생각하니 불안이 분노로 나온다.


저 말이 낯설지 않은 것은, 내가 그 말 그대로 고등학교 때 엄마에게 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14시간 이상 공부만 했지만 성적이 기대처럼 나오지 않은 어느 날, 성적표를 받고 엄마가 실망할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내 성적인데,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게 맞는데 나는 왜 엄마를 더 걱정하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성적표를 내밀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내 성적이고 내 인생인데 나는 엄마가 실망할까 봐 더 걱정했던 것 같아. 이제 내 성적표는 내가 관리할게."


고등학생이라 좀 더 세련되게 말했지만 같은 말이었다. '내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 엄마는 그러라고 하셨다. 엄마가 보든 안 보든 내 삶을 성실하게 살 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도 믿음이 출중한 분이지만, 사실 내가 굉장히 성실한 학생인 것도 맞았다.  


내가 그 말을 이렇게나 빨리 이렇게나 개차반인 녀석에게 듣게 될 줄이야. 이래서 다들 '뿌린 대로 거둔다.', '씨도둑은 못한다.'라고 하나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 야생원숭이가 너무 좋다. 빨래걸이에 걸려있는 이 녀석의 빤쭈만 봐도 귀엽다. 학교에 가고 없으면 또 그렇게 예쁘고 살짝 그리운 마음도 든다. 그렇다고 빨리 오길 바라는 마음은 전혀 없다. 원숭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난 못 살 것 같다. 생각만 해도 극강의 TJ인 내 눈에 눈물이 맺힐 것 같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 녀석은 날 대단히 기쁘게 하진 못해도 타노스처럼 완전히 부숴버릴 수는 있다.


어제는 참았던 울화통이 짜증으로 폭발해 난 두번째 판까지 치고 침대로 돌아갔다. 대신 남편이 내 몫의 두배로 더 카드를 쳐주기로 했다. (눈치 없이 남편이 두 판을 내리 이겨서 원숭이가 폭발했다.) 착하고 감사한 남편이다.

   

정정한다. 아들을 보면 사랑은 참 어렵다.             


 (나는 언제쯤  엄마 침팬지 처럼 아들의 폭주에도 코를 후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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