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li Whale May 02. 2024

키 큰 남자

결국 콘헤드가 되어야 평균키

동희야, 네가 그렇게 원하던 키 큰 남자야!

모자  개를 겹쳐  남편이 말했다. 나는 너무 웃겨서 산책하는 내내 깔깔거리고 웃었다. (지금 사진으로만 봐도 너무 웃기다.)


"키는 컸는데 다리는 그대로 짧아서 뒤에서 보니까 완전 웃겨!"


남편과 밤 산책을 하는데 초저녁부터 나를 괴롭힌 두통 때문에 약을 먹었는데도 머리가 아팠다. 야구모자를 쓰고 왔는데 두통 때문인지 머리가 더 아픈 것 같아 내 모자를 남편 모자 위에 얹었다. 가방을 들고 오지 않으면 패딩 점퍼에 달린 모자에 식빵을 넣어 가져가기도 하고, 남편 모자 위에 내 모자를 얹어 놓기도 한다. 남편은 '양심 어디 팔아먹었냐?'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냥 그렇게 있는다. 10분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의 모자를 족두리처럼 얹어 쓰고는 "이제 너보다 크지?" 하고 개구지게 웃더니 모자 하나를 더 쓰곤 키 큰 남자가 되었다. 그가 너무 웃겨서 머리가 아픈 것까지 까먹을 정도였다.


나는 그가 너무 웃기다. 매번 빵빵 터진다. 그는 새까맣게 까먹었던 옛날 만화영화 주제곡을 아침에 불현듯 부르기도 하고, 개사한 동요를 천연덕스럽게 부른다. 머털도사의 주제가를 귀신같이 기억해 부르고 '에델바이스' '애들 빤스~ 애들 빤스~ 어른은  입는 애들 빤스'라고 부른다. 세상에 그보다 노래를 못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비둘기를 '뽀미'라고 부르고 잠자리를 '나마리'라고 부른다.  덕에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선생님이 아이가 잠자리를 이름을  모른다고 나에게 따로 말씀해 주신 적도 있다. 산책 때마다 물고기가 얼마나 돌아왔나 개천을 살피는데, 물고기는  '물괴'라고 부른다. 연애 때는  보여주고 싶은  있다 근처 개천에 데려가서는 '잉어킹' 가리켰다. 그는 순하고 익살스럽다.


신기하다. 어떻게 14년을 저렇게 한결같이 우스꽝스러운지 모르겠다. 연애를 할 때도 진지한 순간에 나를 빵 터지게 만들기 일쑤였다. 연애 초반에 열심히 밀당 중이어 연락을 안 할 때가 있었는데, 전화 한 통에 나는 무장해제 되었다.


"동희 씨! 우리가 남남 북녀도 아닌데 왜 못 만나나요!"


그 진진한 울부짖음에 이 순수한 남자를 괴롭혀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숨김없이 솔직할까? 이 사람은 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방어가 심하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안 건너는 편이라면 그는 낚싯대나 둘러매고 징검다리도 없는 계곡물을 참방참방 건널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방패를 들고 있으면 어느새 방패 안 쪽으로 와서 '동희 뭐 해?' 하고 웃으며 쳐다보고 창을 들고 있으면 다치니까 내려놓으라고 한다. 정말 신기했다. 삼시새끼만 배불리 먹고, 밤에 잘 자면 매일매일이 어떻게 이렇게 행복한지. 그는 매일 웃는다.  


TCI라는 심리검사를 하면 잘 변하지 않는 기질과 살면서 발달하는 성격을 나눠서 설명해 준다. 기질에는 자극추구,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 인내력이 있고, 성격에는 자율성, 연대감, 자기 초월이 있다. 검사를 시켜보진 않았지만 남편은 분명 자극추구(호기심과 충동)와 위험회피(불안)가 낮고 중간정도의 사회적 민감성과 인내심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낙천적이고 유쾌한 사람'이 그다. 나는 자극추구가 중간, 위험회피가 높음, 사회적 민감성과 인내심이 높다. '걱정이 많고 소심한 사람' 그게 나다. 어릴 때는 외롭지만 안전한 철옹성에 스스로를 가두는 일이 있었지만, 사랑을 하며 조금씩 용감해졌다. 사랑을 하는 일에 위험을 느끼지 않을 만큼 나의 자율성이 높아졌기 때문이고, 좋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을 만큼 연대감이 발전했다.


아마 그가 나와 비슷했다면, 우린 헤어졌을 것이다. 나도 불안한데 옆에먼저 한숨 쉬고  소리가 나기도 전에 이미 도망가버리고 없다면  언제나 혼자 싸워야 했을  같다. 내가 예민한데 같이 까다로웠다면   끼도 같이 먹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 대학교 내내 사람들과 밥을 같이 먹기 싫어서 국문과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있거나 수업이 끝나면 잽싸게 알바를 하러 튀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웬만큼 오래 알고 편한 사람이 아니면 같이 밥을 먹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과 살면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진 않다. 달라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틀려서 헤어진다. 약속을 안 지키고 신뢰를 저버리고 존중하지 않으면 관계는 틀어진다.


우리는 레고 조각처럼 각각 달라서  맞는다. 그는 늪에 빠진  같은 상황에서 나를 활짝 웃게 하고 나의 두통을 잊게  준다. 골치 아픈 일은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나의 불안을 초토화시킨다. 8시간이 넘는 심장수술을 마치고 퉁퉁 부은 얼굴로 나에게 윙크를 해서 나를 웃게 만들었듯이 말이다.


유머는 행복의 불을 붙이는 부싯돌이다.






이전 15화 넌 몇까지 행복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