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다스리기 1탄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은 너무 많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의 고질병 중에 누구보다 빨리 여러 가지 이유로 화가 나는 울화병이 있습니다. 좀 전에도 노트북 받침대의 각도를 조절하려다 마우스패드가 딸려 올라가면서 마우스를 떨어뜨리고는 멍청한 실수를 반복해서 하는 저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해도 동물소리를 내는 동물 같은 아들에게 인간이 아닌 것처럼 화가 났습니다. 사실 제가 화가 잘 나기 때문에 화가 많은 내담자들에게 매우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P는 배우자에게 너무 화가 나서 혼자 상담실을 찾은 30대 초반의 남성입니다. 부부는 이미 이혼에 대해 얘기하고 있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도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어린 자녀가 있고, 이혼을 하든 안 하든 아내를 보기만 해도 너무 화가 나고 그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참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P는 가난했던 유년시절을 혼자 고군분투하며 이겨낸 독립적이고 자신감도 있는 남성으로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너무 가난하고 체격도 왜소해서 학교에서든 동네에서든 맞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맞고 와도 도와줄 수 있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운동도 더 많이 하고 자신만의 특기도 만들어서 지금은 남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는 힘이 생겼습니다. 제가 본 내담자 중 가장 근육이 많은 분이기도 했습니다.
- 이번 주는 어떤 일이 가장 불편했나요?
- 아내가 운영하던 가게를 폐업하는데 제가 철거 작업을 했거든요. 정말 거의 무료로 일을 해줬는데 아내가 감사인사도 제대로 없고 집에 가니까 가게에서 쓰던 리모컨이 어디 있냐고 하는 거예요.
P는 말을 하면서도 화가 났는지 얼굴이 귀까지 빨개져 있었습니다.
- 힘들게 아내를 위해 일을 해주었는데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서운하기도 하고 내내 참다가 리모컨에서 확 터져 버렸나 보네요.
- 네. 가게 처음 인테리어 할 때도 그랬거든요. 이게 되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는데 한 창 일 하고 있는데 와서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달라 하는데 그때도 진짜 화가 났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얘기하니까 진짜...
- 화가 났을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
- 그럼 말이 막 나가요. 욕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 P가 일이 끝나고 지쳐서 집에 왔고 아내가 집으로 와서 리모컨이 어디 있는지 물었고 나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 거네요.
- 네.
-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가요?
-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요.
- 어떤 부분이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날까요?
-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 내 호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그러면서 내 생각에는 뻔뻔하게 리모컨만 찾았고요.
- 네. 그런데 아내는 왜 리모컨을 찾았나요?
- 에어컨은 빌트인이라서 임대인에게 돌려줘야 한다고요.
- 네. 반납해야 하는 물건이라 찾은 거네요. 철거작업을 남편이 했으니 물어볼 사람이 남편뿐이었겠어요.
- 그렇죠.
- 인테리어를 처음 할 때도 아내는 왜 질문을 했던 걸까요? 남편을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걸까요?
- 그건 아니에요..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아요. 아내는 배선이 지나가는 자리나 가능한 일과 아닌 일을 저처럼은 모르니까요. 그래서 답답했어요.
- 네. 아내는 P씨 말씀대로 잘 모르죠. 목공일도 전기 배선도 잘 모르니 아마 담당하고 있던 남편에게 궁금하거나 원하는 것을 얘기했을 것 같아요.
- 네... 맞아요. 아내는 몰라서 물어봤어요.
- 아내는 정말 감사한 마음을 전혀 표현하지 않았나요? 이전에도 지금도?
-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일할 때 음료수 사 와서 수고한다고 하고 가긴 했어요. 와서도 수고했다고 얘기했고요. 그렇게 얘기했는데 정말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던 것 같아요.
-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고 돈 안 들이고 이용하려는 거라는 생각은 정말 사실일까요?
P는 잠시 골똘히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하는 동안 빨개졌던 귀와 얼굴이 다시 제 색깔을 찾았습니다.
P는 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공격하고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쎄 보여야 하는 환경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 맞았고, 무시를 당했고, 이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꽤 오랜 시간 P는 더 잘 살아남기 위해 지금 같은 생존전략을 만들고 유지했을 것입니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는 청소년 때처럼 실제 누군가에게 주먹을 휘두르거나 물리적인 힘을 과시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무시당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필요 이상의 방어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P의 마음에는 '남들의 무시'가 침입하지 못하게 밤낮으로 보초를 서는 경비병이 있고, 그 경비병은 실제 무시도 걸러냈지만 무시인 것 같은, 무시할 것 같은 신호들도 차단해 버렸습니다. 차단의 방법은 분노였고, 그렇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격한 표현들로 스스로를 보호했습니다.
신경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2020) 은 "당신이 흥분했을 때의 행동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흥분하기 전에 당신의 예측을 바꿀 기회가 충분히 있다... 인간이 과거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경험과 조금의 수고를 통해 앞으로 뇌가 예측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P가 이미 화가 났을 때 행동을 바꾸기는 참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화가 나기 전, 마음속 경비병들에게 무시를 스크리닝 하는 기준을 다시 만들어 명령하고 반복해서 학습시키면 진짜 무시만을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시당한 것이 아니라는 샛길이 생기면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관계에서 경험하는 분노도 줄어들 수 있겠지요.
화가 나는 다양한 요인이 있고, 이 얘기는 그중에 한 부분일 것입니다. 나의 무엇이 건드려졌을 때 분노가 확 불타오르는가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힘과 책임이 있습니다. 뇌과학자들이 그렇게 과학적으로 증명을 했다지 않습니까?!
분노의 역치가 매우 낮은 저는 누구보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아들은 저를 화나게 하려고 동물같이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등 생물인 이 어린이는 그저 즐거워서 고래처럼 소리를 지른다는 것을 압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전히 에미는 상어처럼 화가 나니까요.
소음차단 해드폰을 끼고 명상을 해야 할 시간인가 봅니다.
어제의 당신이 쓰던 칼은 오늘의 무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늘의 당신은 다시 나의 무기를 선택하고 연마하여
내일의 나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본문의 사례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제 사례를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와는 다른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