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줘!
"다음 주에 꼭 다시 만나요!"
오직 그것만이 목표인 상담이 있습니다. 성장도 변화도 다시 시작도 아닌, 오직 다음 주에 다시 만나는 것이 목표인 상담입니다. 가끔은 내가 당신을 기다린다고 애걸하기도 합니다. 벼랑 끝에서 발끝에 차이는 지푸라기라도 되고 싶은 마음에 내가 여기 있다고 할 수 있는 최대로 두 팔을 휘적거립니다.
상담실 책상 첫 번째 서랍에는 3가지 서류가 있습니다. 상담동의서, 상담오더지 그리고 자살방지서약서입니다. 언제든 바로 써야 하는 상황이 오면 멀리 가지 않아도 되도록 항상 서랍 안에 비치해 놓습니다. 상담동의서의 주된 내용은 상담에서의 모든 얘기는 비밀이 보장되는데, 몇 가지 비밀보장이 되지 않음에 대한 안내인데요.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자살과 심한 자해의 경우 비밀유지가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상담관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담자의 안전이니까요. 그래야 정말 위기의 순간에 서로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일 없이, 내담자의 안전을 위해 대처할 수 있습니다. 동의서가 그 액션에 대한 허락을 미리 받는 것이라면, 자살방지서약서는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아 보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선언하는 의미입니다. 자살방지서약서에는 '상담을 받는 동안 생명을 위협하는 상해나 자살을 절대로 시도하지 않을 것을 상담자와 문서로 약속하고 아래에 서명합니다.'라는 내용이 골자입니다. 스스로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더 책임을 느끼기에 아무것도 아닌 종이 쪼가리 같지만, 그 힘이 생각보다 큽니다.
1년에 한두 번은 죽으려고 하는 내담자를 옥상에서 다리 위에서 수면제에서 칼날 아래에서 붙잡아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한 것은 단 한 번도 내담자를 완전히 잃은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을, 저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내담자 N이 있습니다.
N은 중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를 자살로 잃었습니다. 하필 N과 사소한 다툼이 있은 며칠 후에 그런 일이 생겼고, 그로 인해 친구의 부모님이 N을 고소하면서 사실과 다른 일들이 일파만파 퍼져나갔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친구를 죽인 가해자로 학교에 소문이 퍼졌고 갑작스러운 경찰조사와 법적인 소송도 수년간 진행되었습니다. 후에 모든 것이 무고로 판결이 났지만, 아이의 마음은 폭격을 맞은 듯 산산이 부서져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믿었던 친구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도 모르는 어른들의 차가운 비난을 받으며, N은 세상으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N은 수시로 자살충동을 느꼈고, 학교를 가지 않았고, 온몸으로 방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으면 이 고통에서 다 벗어날 수 있지 않냐며 울음을 터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상담실에서는 상담자 개인 번호를 주지 않고 행정직원분들이 중간역할을 해주십니다. 상담 자체의 중립성을 위해서도, 상담자의 안전이나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주 긴급한 경우 예외가 생기는데, N의 경우와 같은 위기상황입니다. N에게는 저의 개인 번호를 알려주고 위험한 순간에는 꼭 연락하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서관 뒤뜰에 잔디가 푸릇푸릇 올라와 있고 초록의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반짝반짝 투영되던 한 낮, N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N은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엉엉 울며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 정말 이제 더는 못 견디겠어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저보다 한 뼘은 더 크고, 몸집이 두 배는 더 커서 언뜻 누구도 중학생이라고 보지 못하던 N이었습니다. 이렇게 화창한 날, 이 아이의 삶은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암흑 속에 있었습니다. 아이와 한참을 얘기하고 마음을 토닥이고 겨우 아이의 위치를 확인해 부모님께 연락하고 119에 신고하여 아이를 찾았습니다. 낯선 빌딩 옥상에 혼자 서서 핸드폰을 붙잡고 울고 있던 아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저립니다. 옥상 문이 열린 빌딩을 여기저기 찾아 헤매며 아이는 얼마나 더 참담하고 외로웠을까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더 이상 헤어질 때마다 다음 주에 꼭 다시 보자고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 도장 찍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더라고요. 물론 그 시간이 짧지는 않았습니다... 비바람도 잦아들고, 폭격으로 폐허가 된 아이의 마음에도 다시 볕이 들고 삐죽 새싹이 돋는 때가 왔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음을 알게 되는 그런 순간이 있으니까요.
절망에 갇힌 순간 무엇이 그 사람의 지푸라기가 되어 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가족과 친구, 연인 일 수도,
먹고 싶은 떡볶이이거나,
다음 주에 다시 만나자는 실낱같은 약속 일 수도,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마주한 행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무엇이라도 그 누구라도 또 다른 N을 잡아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다시 옥상에서 내려오기를,
다리 난간 안 쪽으로 넘어오기를,
손에 든 칼과 약을 내려놓기를 기도합니다.
* 본문의 사례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제 사례를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와는 다른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