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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Mar 14. 2024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사랑이나 해

삶의 유한함이 주는 불안과 여유

간밤에 꿈에서 내 머릿속에 주먹만 한 암덩어리가 있었다. 대학병원의 진료실에서 나는 홀로 여명이 6개월 정도 남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순간 아직 어린 아들이 생각나 눈물이 날 뻔했는데 실제 흐르진 않았다. 나의 아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라 스스로 똥을 닦을 수 있는 나이인데 꿈에서는 아들이 똥도 못 닦는 어린애여서 나의 슬픔은 더욱 컸었다. 나는 꿈이 집단무의식이나 미래의 예언이 아닌 과거의 기억이나 정보가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두뇌활동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아마도 작년 시아버님의 시한부 선고를 들었던 진료실의 기억과 엄마로서의 마음이 어느 지점에서 뿅 하고 손을 잡은 것 같았다.    


잠에서 깼을 때도 나는 그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마치 좀 전에 병원에서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편과 아침을 먹으면서 꿈 얘기를 했다.


- 아침에 꿈꿨는데 내가 암에 걸렸고 반년도 못 살 거라고 했는데, 순간 우리 원숭이(아들 별명이다) 생각에 울뻔했잖아. 지금도 눈물 날 것 같아.

- 나도 그 기분 알잖아. 난 요새도 가끔 그런 꿈꿔.

- 맞아. 오빠 수술하러 갈 때 숭이 다시 못 볼까 봐 울었잖아. 숭이는 신난다고 할머니 따라갔는데.

- 맞아.

- 근데 오빠는 전혀 안중에 없었어. 너도 꿈에서 내가 안중에 없었냐?

- 몰라. 기억도 안 나.


남편은 우리의 아들이 3살인가 쯤에 자신에게 지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삼천판, 승모판막폐쇄부전이라는 병으로 심장판막이 기능을 잘 못해 심장에서 피가 옳게 흐르지 않고 역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판막의 상태가 좋지 않고 그 역류가 너무 심하여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우연히 내과에서 심장소리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몇 주 만에 삶의 시계가 달리 흘렀다.


남편의 우심방과 우심실 사이의 삼천판막과 좌심방과 좌심실 사이의 승모판막은 아마 수년 또는 수십 년에 걸쳐 '너덜너덜'해져오고 있었다. '너덜너덜'은 남편 수술을 집도해 주신 아산병원 의사 선생님의 표현이었는데 난 종종 그 모습이 실제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남편은 그 당시 8시간이 넘는 대 수술 끝에 온몸에 줄을 주렁주렁 달고 살아났다. 다행히 판막을 교체할 정도가 아니어 성형술을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너덜너덜 해진 판막을 꿰매주는 수술"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약 5년 정도가 지나, 매년 하는 정기검사에서 남편의 판막들은 흥부바지처럼 다시 구멍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양말이나 손장갑을 꿰매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무리 열심히 꿰매도 꿰맨 그 자리든 그 옆이든 결국은 다시 구멍이 난다. 몸의 무엇도 자기 것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형편없어도 조금이라도 쓸만하면 그것을 살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 인간의 모든 장기와 뼈와 살은 결국 언젠가 그 쓰임을 다 하게 된다. 그러니, 애써 꿰매어놓은 장기는 오죽하겠는가.


남편이 심장병환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수술을 하고, 다시 심장의 피가 샌다는 얘기를 들으며 잊을 만하면 다시 인생은 유한하다고 운명은 나의 뼈를 때린다.


'그는 언제나 우리의 곁에 있을 수는 없다.'


라는 것이 진리이지만 잊고 싶은데 자꾸 일깨워준다. 하지만 그 진리가 가장 가혹하게 느낄 사람은 '나는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라고 느낄 본인 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한 번밖에 안 꾼 죽음에 대한 꿈을 그는 여러 번 꾸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가끔 남편의 왼쪽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고 조용히 그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내 것보다 빠른 것 같기도 어떤 때는 불규칙한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누가 먼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누구의 시계가 더 빨리 째깍이고 있을지는 신 만이 알 것이다. 내가 먼저든 그가 먼저든, 그의 알려진 병은 우리의 시계가 영원하지 않고 언제든 멈출 수 있는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하지만 둘 다 그 시계가 아들에게 빨리 가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 어떤 경우도 옵션에 넣지 않는다.)  삶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나를 불안하게도 하지만 여유롭게도 한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아들을 혼자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 한 번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꼭 그 이유 만으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커리어를 꾸준히 유지하는 데는 나의 불안이 제일 큰 원동력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남편에게 화가 날 때도 '젠장. 너나 나나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빨리 화해하자.'라는 마음에 20대처럼 싸움을 질질 끌지 않는다. 서로 기분이 나쁜 채 불쾌하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 그래 우리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야생 원숭이에게 잘해줘야겠지?


초등학생인 아들이 밤낮으로 미친 야생원숭이처럼 날뛰는데 철장 안에 가두고 싶지만 다시 여유를 가져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사랑이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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