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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Sep 27. 2024

15. 엄마가 죽었다

윤영과 함께 자신을 버린 친엄마의 장례식에 가는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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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손해 볼 것이 있을까요?

윤영은 영철의 소장을 들고 변호사를 찾아간다. 혹시라도 양육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운 윤영은 지수에게 벽을 쌓고. 하지만 그의 충격적인 한 마디에 달려가는 윤영.


지수는 윤영의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아버지에게 부고 문자를 받았을 때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냥 이상했다. 문자를 확인만 하고 배달 중개 어플을 켰다. 얼마 안 되어 콜이 울렸다. 새벽까지 사람들에게 치킨과 마라탕과 족발을 날라 주었다. 숙소로 들어와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 작업 중이던 오토바이 앞에 앉아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가게를 청소하고 일찍 학교에 갔다. 수업이 없었다. 후배들만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학교를 다시 나왔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잡고 있는데 윤영의 프로필이 눈에 띄었다. 눈앞이 온통 뿌연 안개로 뒤덮인 것 같았지만 오직 그녀만이 등대처럼 또렷하게 빛났다.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답이 없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보고 싶어요.”      


그녀의 번호로 발신 버튼을 눌렀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외로웠다. 다시 가게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아직 오픈하지 않은 가게의 문을 열고 일거리를 찾았다. 읽지 않고 넘겨지는 책장처럼 시간이 한 장 한 장 넘어갔다.      


윤영에게 전화가 왔을 때, 꺼져있던 스위치가 탁 켜지는 것 같았다. 별일 없냐는 그녀의 질문에 ‘엄마가 죽었대요.’라고 말하는데 어색하고 기괴했다. 말로 뱉으니 문자로 봤을 때보다 ‘엄마’라는 사람의 죽음이 현실로 훅하고 다가왔다. 엄마가 죽었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문자를 봤을 때, 직감적으로 그 엄마가 키워준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장례식장의 위치와 시간이 적혀있는 문자가 이어서 왔을 때 처음으로 친엄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둘 사이에는 어떤 기억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수에게는 그저 남이었다.      


지수가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자신이 학교에서 돌아온 줄 모르고 이모와 엄마가 얘기하고 있었다. 이모가 “쟤 데리고 있는 건 괜찮아? 형부, 쟤 엄마 밖에서 만나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그것도 웃겨. 애를 맡겨놓고 어떻게 한 번을 연락을 안 하지?”라고 말했다. 지수의 귀로 '쟤 엄마'라는 말이 쑥 들어왔다. '엄마'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오히려 이제까지의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은 아버지가 제자와의 불륜으로 낳은 아이였다. 지수의 친엄마는 지수를 몰래 낳아 1년 정도를 기르고 아버지에게 맡기고 도망갔다고 했다. 그런 지수를 지금의 엄마가 기른 것이다. 지수가 들고 있던 신발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엄마와 이모가 나왔다. 이모의 곤란한 표정과 달리 엄마의 표정은 냉담했다. 지수는 그 뒤로도 자신이 들은 얘기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더는 숨길 필요 없다는 듯 대놓고 지수를 모른척했다. 남편과 싸울 때도 지수가 듣건 말건 남편에게 '제자와 붙어먹은 더러운 놈'이라는 욕도 서슴지 않았다. 지수도 더는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눈치 보지 않았다. 그건 노력해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자신에게 생모가 있다는 것에 막연한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고, 이런 집구석에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수는 생모의 얼굴도 이름도 몰랐다. 그리움도 원망도 실체 없는 표적에 꽂은 화살이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도 양엄마도 친엄마도 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윤영이 가게로 가고 있다는 메시지가 왔다. 지수는 사장 형에게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얘기했다. 대니 형이 당황한 표정으로 어색한 위로를 전했다. 슬픔도 걱정도 담담함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었다. 아마 자신의 표정도 저 어디쯤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형은 지수의 사정을 대충은 알고 있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봐야지?” 하는 물음에 “그래야 해요?”라고 다시 물었다. 형은 답이 없었다. 지수는 그런 형이 좋았다.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윤영이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몰라 빨아놓은 검정 티셔츠에 패딩을 꺼내 입었다. 달리 입을 옷이 없었다.  

    

가게 유리문 너머로 윤영의 차가 보였다. 그녀와 장례식장에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이미 기다리고 있는 윤영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혼자 장례식장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모른 척하고 도망가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친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녀가 함께 있어 주기를 바랐다. 지수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갔다. 운전석에 앉은 윤영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윤영이 핼쑥한 얼굴로 조수석에 앉은 지수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그런 지수의 얼굴을 윤영이 손으로 어루만졌다. 지수가 그런 윤영의 손등을 잡았는데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꼭 감았다.     


윤영이 지수에게 장례식장의 위치를 물었다. 부고 문자를 확인한 윤영은 지수의 의사를 묻지 않고 말없이 차를 몰았다. 이제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지 초저녁부터 어둠이 짙어졌다. 장례식장은 아버지가 일하는 대학과 같은 지역이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고도 지수는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윤영이었다.      


- 가봐야지.

- 왜요?

- 그러게. 그럼 돌아갈까?      


하지만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또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 가야 할까요?

- 몰라. 그건 네가 결정해야지. 가기 싫으면 가지 마.      


그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차 안에 가득 울렸다.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 난 안 갔어. 아빠가 죽었다고 엄마가 그랬거든. 전화로 너는 그래도 피붙이니까 가보라고 그러더라. 한창 일하느라 바쁜 때였거든. 기억도 안 나는 아빠 때문에 일을 빼고 싶지 않았어. 사실 핑계고. 혼가 가기가 무서웠던 것 같아. 그래도 나중에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

- 저 봤어요. 지난번 아버지한테 갔을 때. 그 사람 같아요. 전혀 눈치 못 챘거든요.      


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윤영이 몸을 돌려 지수를 꼭 안았다. 윤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괜찮아. 무서우면 같이 들어가 줄까?     


지수가 윤영을 더 세게 안았다. 지수가 마음을 결정하고 윤영에게 말했다.      


- 아니에요. 혼자 갈게요. 힘드니까 기다리지 말고 가요.

- 그래.      


지수가 차 문을 열고 장례식장 안으로 걸어갔다.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녀가 있어서 든든했다. 돌아갈 곳이 생긴 기분이었다. 이것이 진짜 가족에게서 느끼는 기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장은 처음이었다. 지수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엄마도 아버지도 그를 장례식장에 데려가지 않았다. 장례식장이라는 곳의 분위기를 상상할 수는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한 적이 없었다. 건너 건너 아는 형이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로 죽은 적이 있지만, 아주 친하지 않아 안 됐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어떻고, 남은 사람들이 죽음 후를 어떻게 감당하는지 지수는 알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전광판에 고인의 이름과 가족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문자에서 본 생모의 이름보다 상주에 적힌 ‘민정철’이라는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는 방을 확인하고 눈으로 찾았다. 입구 밖, 푯말에는 생모의 이름과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함께 있었다. 셋이 한 가족으로 묶여 있는 것이 낯설었다. 입구로 들어가자 절에서나 맡을 법한 향냄새와 기사식당에서 풍겨오는 육개장 냄새가 동시에 났다. 향냄새가 나는 쪽에 분향소가, 음식 냄새가 나는 곳에 조문객이 밥을 먹는 식당이 있었다.      


직사각형의 작은 분향소에는 국화꽃이 장식된 제단이 있었다. 검은 양복에 완장을 찬 아버지가 제단 옆에 앉아 있었다. 제단 앞으로 제사에 쓰는 음식과 향로가 있었다. 제단의 중앙에 낯선 여자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반곱슬의 긴 머리는 풍성하고 윤기 있었다. 선이 얇은 이목구비가 낯이 익었다. 섬세하고 지적인 얼굴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사진 속의 여자는 생기가 가득했다. 아버지의 연구실에서 본 그 여자였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았지만 분명 같은 사람이었다. 살아있을 때가 더 죽어 있는 것 같았고 죽은 사람의 사진이 더 살아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지수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더니 제단 앞으로 데려가 말했다.     


- 절 먼저 해라. 향 올리고 두 번 절하면 돼.      


우물쭈물하는 지수에게 아버지가 향을 쥐여주었다. 지수는 향을 받아 들고 앞에 있는 촛불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고 두 번 절 했다. 아버지가 말없이 그를 데리고 1층의 사무실에 가더니 양복을 주었다. 양복을 갈아입은 지수는 부쩍 어른 같았다. 지수가 나오자 아버지가 자신이 차고 있는 것과 같은 두 줄 완장을 아들의 팔뚝에 채워주었다.      


- 밥 먹자.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배가 고팠다. 하얀 비닐이 깔린 식탁으로 아줌마들이 일회용기에 담긴 음식을 내왔다. 빨간 육개장이었다. 아버지와 한 식탁에 앉은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너무 불편해서 체할 것 같았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둘은 하얀 쌀밥을 국에 말아 후루룩 먹었다. 아버지가 상에 놓인 소주를 연거푸 마셨다. 그가 왜 상주인지, 이제까지 계속 자신의 친생모와 연락하면서도 자신에게는 모른 척한 것인지 묻고 싶었다. 친생모는 왜 죽었는지, 이런 모든 일을 서울의 엄마는 알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폐점 시간이 지나 굳게 닫힌 문 같았다. 지수에게는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문이었다. 그가 먼저 일어나 분향소로 갔다. 아무 설명도 없는 그가 미웠다.     


밥을 먹고 있는 그들 앞에 장례지도사가 와서 말했다.      


-  아드님 오셨으면 이제 입관식 진행하실까요?

 - 네.      


민정철이 답했다. 지수는 입관식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들을 따라갔다. 오직 둘 뿐이었다.      


- 다른 가족은 더 없으신가요?

- 네.      


지수는 친생모에게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아버지를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지수에게 아버지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 싫어서 빨리 성인이 되어 완전히 독립하고 싶었다. 성인이 되면 아버지라는 보호자는 필요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밉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떠나고 싶었지, 아버지가 없어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실제 지수는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지수의 바람과 맞지 않았을 뿐, 민정철은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완전히 떠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지수의 엄마는 혼자였다. 죽어서도 그녀의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저 무심한 남자뿐이라는 것이 불쌍해서 화가 났다.      


민정철과 지수가 장례지도사의 뒤를 따라 입관실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연구실에서 만난 그 사람이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지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짧고 힘없는 머리카락에 앙상하게 뼈만 남은 얼굴이지만, 섬세하고 고왔다. 이제는 눈을 감은 여자의 얼굴은 전보다 편안하고 환해 보였다. 한 줌도 안 될 것 같은 허리와 어깨에 커다란 수의가 싸매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자신의 엄마라는 것이 낯설고 슬펐다.      


- 고인에게 마지막으로 전할 말씀이 있으면 지금 하세요. 마지막으로 고인의 몸에 손을 대셔도 됩니다.      


아버지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의 손이 고인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얇고  아버지의 손이 떨렸다.      


- 연수야, 미안해.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 지수 걱정도 하지 말고 편안해라. 미안해 연수야.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버지는 이내 벌게진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했다는 것이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연구실에서 만난 그 여자의 알 수 없는 눈빛은 그녀가 사랑하는 아들을 잘 키워줬다는 것에 대해 감사함이었다. 지수도 목이 메어왔다. 한순간에 닥친 이 모든 일이 당황스러웠지만 모두 실제였다. 지수의 눈앞에 처음 만난 엄마가 있었고, 이미 죽었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떠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다. 지수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꼭 쥐었다. 무의식 중에 밀리듯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고인의 손이 수의 앞으로 곱게 포개어져 있었다. 연구실에서 지수의 손을 토닥이며 잡았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지수가 주먹을 풀고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엄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뱉어지지 않았다.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안녕히 가세요.     


짧은 한마디가 어렵게 토해졌다. 지수의 마음이 갈라지고 찢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다가와 그런 아들을 꼭 껴안았다. 둘 뿐이었다.      


천판이 닫히고 입관식이 끝났다. 지수는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분향소에 돌아왔을 때 매캐한 향냄새가 그를 다시 현실로 불러들이는 것 같았다. 지수의 아버지는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중간중간 향이 꺼지지 않게 새로 피웠다. 조문객은 거의 없었다. 지수가 전혀 모르는 얼굴의 사람들 몇이 왔다 갔고, 대니가 혜림과 왔다. 윤영이 누구도 아는 체하지 않고 조용히 조문을 올리고 갔다.      


더는 누구도 오지 않을 때, 지수가 아버지의 옆에 앉아 물었다.      


- 그 여자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된 것에요?

- 암이었다. 알았을 때는 이미 얼마 안 남았다고 했어.

- 버려놓고 왜? 죽을 때 돼서 왜요! 왜 이따위로 나타나는 건데요!     


지수가 낮게 소리쳤다.      


- 널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했어. 치료도 받지 않고 미국에서 왔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 그걸 왜 다 아버지가 결정해요?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던 민정철이 입을 열었다.      


- 너한테는 미안하다.      


아버지는 어떤 순간에도 지수에게 사과한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받은 사과였다. 허무할 정도로 간결했다.     


- 나한테 다 왜 그래요? 아버지도 엄마도 나한테 정말 다 왜 그래요.

- 지수야, 네 엄마는 널 버리지 않았다. 내가 데려온 거야. 싫다는 연수를 내가 설득했어. 다 내 탓이야. 네 엄마는 끝까지 널 포기하지 않았어. 내가 빼앗았다. 그게 너와 연수를 위한 거라고 믿었어.      


민정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수가 연구실에서 처음 봤던  표정이었다. 아버지의 절박한 목소리에는 후회와 자책이 섞여 있었다. 지수가 그런 민정철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미워했고, 원망했던 아버지단단했던 철옹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친생모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지방대에서 보기 힘든 총명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가족이 없었고 생활은 궁핍했다. 그런 그녀를 키워주고 싶어 시작된 관계였다. 끝까지 공부하려면 한국보다는 미국이 더 나았다. 유학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도 민정철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둘은 사랑에 빠졌다. 유학을 앞두고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아버지는 결혼을 파투 내고 제자와 사랑의 도피를 할 만큼 무모하지 못했다. 그가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여자가 사라졌다. 그녀가 다시 나타났을 때, 아버지는 여자에게 아들을 빼앗았다. 여자를 원래 계획대로 유학 보내고 민정철은 연락을 끊었다. 그는 그녀가 박사를 마치고 교수가 되어 잘 산다고 믿었다. 다시 연락이 왔을 때, 그녀가 얼마 못 산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그녀의 부탁을 민정철은 거절하지 못했다.     


어른이라고 대단하게 보았던 아버지는 비겁하고 우유부단한 남자일 뿐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사랑한 여자와 피붙이를 책임지려 했던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방법은 민정철이란 사람처럼 고지식했다. 그것은 지수가 원하는 방법과 달랐고, 그 어떤 결정에도 지수의 선택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쩌면 나름의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의 생각에 아버지는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선택을 했지만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도 더 나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까지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을 모두 용서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처럼 화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새벽이 빠르게 왔다. 지수와 민정철은 화장터로 이동하기 위해 나왔다. 대니와 혜림이 지수의 뒤를 따랐다.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을 때 지수는 여전히 주차되어 있는 윤영의 차를 보았다. 당장 그 차로 달려가 타고 싶었지만 바라만 보았다. 핸드폰으로 이제 괜찮으니 돌아가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연수란 여자의 몸이 화구 안에서 불타 한 줌 재로 남았다. 민정철은 고인의 뼛가루를 항아리에 담아 봉안당에 가지고 갔다. 모든 순간이 꿈처럼 지나갔다. 아버지는 사랑했던 여자를 완전히 떠나보내는 반복되는 과정에서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지수는 있지도 않았던 엄마를 보내고 또 보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지수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불편한 기운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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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은호가 학폭에!

윤영은 지수를 멀리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은호의 학교에서 온 연락이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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