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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Sep 26. 2024

14. 손해 볼 것이 있을까요?

양육권을 잃을까 지수의 연락에 답하지 못하는 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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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기다리는 연락은 오지 않고

자신의 침대에서 함께 새벽을 보낸 후 윤영에게는 연락이 없고, 지수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손해 볼 것이 있을까요?”     


변호사의 마지막 말이 윤영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철을 만나고 온 이후 윤영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윤영이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은호를 빼앗기는 것이었다. 뒤늦게 아빠라고 나타나서 윤영에게 은호를 데려가고 그들 마음대로 은호의 삶을 좌지우지할 것을 생각하면 분노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은호 때문에 힘들었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았고 은호를 버린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큰소리를 치고 왔지만, 불안이 윤영을 집어삼킬 것처럼 달려들었다.       


변호사는 영철이 설령 친생자존재확인소송을 진행해서 친생자임이 확인되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아무리 영철의 집이 부유하다고 해도 이제까지 양육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친생부에게 법원이 친권을 변경해 준 사례는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친권만 확실히 가지고 있다면 윤영이 걱정하는 그들 마음대로 은호를 다른 나라로 데려가거나 수술을 시키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고 했다. 반면, 은호가 영철의 친생자로 법적인 권리를 받으면 이제까지 받지 못한 양육비 청구 소송이 가능하고, 후에 재산상속에서도 아들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은 그들이 급한 마음에 친생자 존재를 확인하는 소송을 하여 법적인 권리를 얻으려 하나 그들의 뜻대로 되기는 힘들고, 오히려 모자에게는 실보다 득이 많은 소송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에 대한 학대나 방임이 의심된다면 친권이나 양육권을 박탈당할 수 있으니 지금은 어떤 일에서든 아들과의 관계를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변호사는 소송을 한다는 자체가 아마도 윤영의 치부를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 친권을 박탈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했다.     

 

윤영이 잘못한다면 엄마의 권리도 빼앗길 수 있다는 말이 당연하지만 서늘했다. 내 자식, 내 것으로 생각한 은호가 한 인간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고 엄마라도 그에게 옳지 않다면 나라에서 은호를 빼앗아 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은호는 윤영의 것도 영철의 것도 아니었다. 내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윤영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인 자신이었고, 가장 두려워할 사람은 영철이 아닌 은호였다. 윤영의 머릿속에 '은호가 아빠를 따라가고 싶어 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스치자 철옹성처럼 단단했던 전의가 모래성처럼 부서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소송을 윤영이 원하는 방향으로 비틀어 가기 위해 집중해야 했다. 윤영은 끝없이 펼쳐지는 불안이 만드는 잡생각들을 털어내려 애썼다. 먼저 소송을 시작했고, 윤영의 동의 없이 은호를 만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윤영은 영철이 은호의 골수를 빼가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을 증명해 줄 어제의 녹취파일을 변호사에게 전송했다.      


다음날 윤영은 아침부터 차를 타고 나갔다. 당장 생활비가 필요했기에 실업급여 신청을 미룰 수 없었다. 온라인상에서 복잡한 절차는 완료했지만, 아직 고용센터에 직접 방문하여 신청은 하지 않은 차였다. 퇴직금으로 당장 생활은 가능했지만, 그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고용센터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북적였다. 변호사는 훗날 양육권이나 친권 변경을 위한 재판에 대비하기 위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당장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태풍의 중앙에 서 있었지만, 일상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고용센터에는 갈 곳 없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직업이 없는 사람이 자신만은 아닌 것 같아 위안이 되면서도 반갑지 않았다. 윤영은 대기표를 받고 기다렸다. 수십 명의 대기자가 있었다. 주변에 다양한 전단들이 눈에 띄었다. 제과제빵이나 바리스타, IT 관련된 자격증과 미용 관련 전단도 있었지만, 지수가 하는 자동차 정비나 중장비운전과 관련한 정보가 더 눈에 들어왔다. 이제까지는 전혀 상관없던 일에 눈길이 가는 자신이 신기했다. 미용 일이 나쁘지 않았지만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젊어서 괜찮지만, 언제까지 종일 서서 손에 독한 약을 묻히고 일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미래에 대한 꿈을 꾸지 못했다. 당장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 너무 벅찼다.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에 치여서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윤영은 자신이 애처로웠다. 가판대의 전단을 한 장씩 꺼내 가방 안에 넣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전광판에 윤영의 번호가 켜졌다. 직원이 있는 부스로 가려할 때, 전화가 왔다. 지수였다.     


영철의 일을 알게 되고부터 지수의 전화를 받지도 메시지에 답을 하지도 않았다. 지수의 이름을 본다는 자체가 죄책감이 느껴지고 불안한 마음이 삐죽 고개를 들었다. 은호가 친생부를 만나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은 어린 남자를 만나 행복했었다는 것이 괴로웠다. 혹시라도 영철이 지수와의 관계를 알게 되어 양육권이나 친권 변경을 위한 약점으로 이용할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은호가 알게 되어 자신에게 실망하고 영철에게 가버릴까 하는 것이었다.


윤영이 전화를 받지않자 두어번 더 전화가 걸려왔다. 윤영은 핸드폰 벨소리를 무음으로 하고 실업급여 접수를 마무리했다. 직원이 복잡한 조건들을 설명해 줬지만, 어떤 말도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일이 마무리되었다. 밖으로 나와 핸드폰을 손에 쥐고 한참을 서 있었다.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이름만 봐도 돌아서려는 마음이 프라이팬에 버터처럼 녹아버렸다. 카카오톡으로 지수의 밀린 메시지를 확인했다. 며칠 동안 한 번도 답을 하지 않았다. 한창 물밀듯이 오던 메시지가 어제오늘 뜸해져 있었다. 마지막에는 이전 같은 발랄한 이모티콘 없이 ‘보고 싶어요.’라는 문장이 덩그러니 있었다.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 부재중으로 남아있는 지수의 번호를 눌렀다.   

   

- 무슨 일 있니?

-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무슨 일 있어요?

- 아니야.

- 그럼 됐어요.

- 넌 별일 없어?     


지수가 말이 없었다.   

   

- 무슨 일 있어?

- 엄마가 죽었대요.


다음 이야기

15. 엄마가 죽었다.

자신을 버린 친엄마의 부고를 받은 지수는 혼란스럽다. 그런 지수를 데리고 장례식장을 향하는 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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