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동 지렁이 구조대장
지렁이는 먹이사슬 제일 하위에 존재하는 최약체이지만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땅을 비옥하게 해준다. 나는 지렁이가 무섭지만 안쓰럽다.
지렁이를 구조하기 시작한지는 5년이 넘었다.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부터이다. 짜구를 기르면서 1일 2산책이 생활화 되었는데 이전에 살던 집은 밖으로 나가면 바로 아스팔트와 보도블럭이여서 지렁이를 마주할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문 밖으로 나가면 거의 바로 주변이 공원과 운동장, 개천이다. 그래서 사계절 내내 온갖 동생물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산속은 아니라 인도가 주인공이고 그 주변에 녹지가 있다.
지렁이가 가장 많이 보도블럭으로 나오는 때는 비가 오기 전과 비가 온 후 이다. 땅이 비에 젖으면 숨을 쉬지 못하는 녀석들이 숨을 쉬려고 기어나온다. 눈이 없는 녀석들은 그 곳이 죽을 곳인지도 모르고 살겠다고 열심히 돌진한다. 그러다 보면 악의 없는 사람들의 신발에 밟히기도 하고, 자전거에 짖눌리기도 한다. 사람이 아니어도 한 여름에는 뙤양볕에 말라죽고 하수구에 빠져 익사하기도 한다. 봄이되면 까치나 비둘기가 열심히 먹이활동을 하며 지렁이를 먹기도 하는데 그렇게 죽으면 그래도 덜 안타깝다. 사람들이 편리하려고 만들어 놓은 보도블럭이나 아스팔트에서 지렁이들은 나뭇잎처럼 우수수 죽는다. 물론 인간으로 태어나 나도 수없이 자연에 해가되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나의 "염치"가 지렁이를 구조하는 일이다.
추웠던 겨울이 가고 봄의 기운이 움틀면서 땅 속에 있던 생명들이 삐죽 삐죽 밖으로 나왔다. 새싹 들이 나오고, 나무에서는 꽃봉오리가 아기손톱처럼 매달린다. 그리고 다시 운*동지렁이구조대(지구대)의 활동이 시작됐다. 이전에는 3월 초에도 지렁이들이 숨을 쉬겠다고 꼬물꼬물 기어나왔는데, 올해는 추위가 길어서인지 지렁이의 출현이 다소 늦는 것 같았다. 몇마리가 늦은 밤이나 새벽에 나왔다가 내가 아침에 구해줄 틈도 없이 꽁꽁 얼어있었다. 그리고 3월 중순이 넘어서면서 드디어 지렁이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원래 지구대 대장은 남편이었는데 허리 디스크가 심해지면서 고문자리를 꽤 차고 앉았고 두려움이 없는 아들은 청소년이 되면서 산책을 거부했다. 결국 지렁이를 무서워하는 내가 고문 한 명과 임시직 한 명을 둔 지구대장이 되었다.
지렁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장비가 필요한데, 끝이 얋고 뾰족하며 빳빳한 나뭇가지가 제일 좋다. 간혹 너무 쌩쌩한 왕지락 녀석들은 커다란 나뭇잎을 이용해 들 것처럼 들어서 숲으로 던진다. 하지만 지렁이는 나올 때 몰려서 나오기 때문에 흐린 날 1km 정도 산책을 하다보면 김소월의 진달래꽃 처럼 가시는 걸음걸음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나의 산책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살려야할 지렁이는 많기 때문에 효율도 매우 중요하다. 그 때는 나무 꼬챙이 만한 것이 없다. 수년간 다져진 기술로 근거리에서는 탄력을 이용해 지렁이를 화단 쪽으로 튕겨 넣고 1~3미터 이상 장거리 에서는 균형을 잘 잡아서 나뭇가지에 걸어서 땅으로 던져준다. 지렁이 머리 쪽에 허리띠 같이 약간 굵게 둘러진 환대가 있는데 그 밑으로 잘 들고가면 균형을 맞추기 쉽다.
나의 힐링과 심리적 보상을 위해 지렁이를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생명들을 살리고 나면 돌아오는 길에는 현기증과 허리통증을 느끼면서도 기분이 좋다.
나는 운*동 지렁이 구조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