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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May 20. 2024

20세 외노자 in London

나는 런던의 일당백 외노자!

내가 런던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때는 2001년 봄이었다. 5월에 입국해서 그다음 해 2월에 출국하는 꽉 채운 10개월의 여정이었다. 우리나라 5월을 생각하고 산뜻하게 공항 입구를 나섰다가 칼바람을 맞고 다시 들어와서 가방 안의 옷을 꺼내 입었다. 그 해가 2001년이었던 것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열심히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긴급 뉴스가 나왔다. 911 테러가 생방송되고 있었다. 미국의 월드트레이드빌딩으로 항공기가 충돌하여 어마어마한 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이민자였던 사장님은 라디오 앞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놀란 토끼눈을 했었다.


요새는 한국 어디를 가나 동남아시아 쪽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후진국에서  외노자를 무시하는 풍조가 있지만, 한국인이 어떤 우월감을 가지기에는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서 우리의 처지도 그들과 다를  없어 간혹 쓴웃음이 나온다. 체감상 흑인보다  무시받을 때가 많다. 내가 영국에 갔을 , 나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영어를 아주 잘 하진 못하는 외노자에 불과했다.


이민국을 지날 때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어깨가 절로 축 쳐진다. 여행을 갈 때와 살러 갈 때는 그 기분이 확연히 다르다. 돈을 쓰러 갈 때와 돈을 벌러 가는 차이인가? 영국은 아니고 미국으로 입국할 때였는데, 대기가 너무 기다며 음식점에서 항의하듯 목소리를 높여 투덜거리는 중년의 한국인 아저씨를 보고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민국 직원이 다가오더니 딱 한마디를 했다.


"너 너네 나라로 돌아갈래?"


아저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아저씨의 태도보다 이민국 직원의 말이 나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의 말은 '여기 너희 나라 아니야. 싫으면 가.'처럼 들렸다. 네가 오고 싶어 왔으니 눈치껏 잘 있어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이런저런 불만이 생기면 항의를 한다. 내 얘기를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외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난 영국에서 처음 배웠다. 그 나라에 대해 잘 모르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없고, 설령 잘 안다고 해도 그들은 나에게 힘을 주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무 살에는 누가 나를 무시해도 또박또박 얘기해주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를 쉽게 고용해 주는 사장님이 없었고  가게  가게 고르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나는 최저시급도 주지 않는 불법 고용인에게도  보이려고 웃었다. 어느 나라를 가나 맥도날드가 법정 최저 시급을 주는데, 내가 일한 가게에서는 맥도날드의 2/3 정도의 시급을 줬다. 그럼에도 영어도  못하는 나를 고용해 주니 감사한 마음이었다.


아침 7시 전에 도착하면 청소를 하고 샌드위치 재료를 준비했다. 가장 먼저, 냉동실의 생지(이미 형태가 갖추어진 빵 반죽)를 오븐에 넣고 감자에 포일을 씌워 오븐 가장 밑 칸에 넣는다. 그다음에  양상추, 오이, 토마토를 씻고 슬라이스 해서 큰 그릇에 담고 커다란 참치캔을 뜯어 기름을 짜냈다. 삶은 계란을 으깨어 마요네즈에 버무리고, 벽돌 같은 체다 치즈를 채칼로 썰어 사각 용기 가득 담아둔다. 그렇게 30가지가 넘는 샌드위치 필링을 준비해 각 용기에 담고 있으면 손님이 모여든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에 빵이 타지 않게 시간이 되면 빨리 빼서 진열을 한다. 여러 종류의 크루아상이 각각 다른 시간에 익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잘 점검해야 했다. 그때부터는 전쟁이다. 카운터에 사장님, 주방에는 오직 나뿐이었다. 나는 말 그대로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니며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내놓았다. 아침 장사가 끝나면 다시 동일한 과정으로 점심장사를 준비했다. 주방에는 의자가 없기 때문에 참치캔에 앉아서 점심으로 무료 제공되는 치즈샌드위치를 먹었다. 점심이 되면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틈틈이 갓 만든 샌드위치를 거대한 쟁반에 가득 담아 양손에 들고 걸어서 배달도 갔다. 2시 이후에는 방과 후 학생들이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 듯 샛노랗게 몰려왔다. 4시부터는 주방을 정리하고 유통기한을 체크하며 재고 정리를 하고 홀을 청소했다. 난 고국에 먹여 살려야 할 가족도 없는데 아침 7시부터 저녁 5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일을 해보니, 고급 영어 따윈 필요 없고 산수 할 줄 알고 tomato, lettuce, cucumber 만 알면 얼추 되었다.


 Camden Town에 있던 내가 일하던 샌드위치 가게. 2001.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내가 찾지 않는 나의 권리를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당했다.

그들은 이중계약을 하고도 사과하지 않았고 (Homless 집이 없던 삶 (brunch.co.kr) 참고) 최저임금도 주지 않으면서 당당했다. 영어를 잘 못한다고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았고 지각 한 번 하지 않았고 손님에게 항의를 받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덜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고, 좀 무시당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달을 가도 팁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쟤는 그래도 돼.' 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 당시에는 부당하게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이었으면 그런 곳에서 일도 안 했거니와 3개월 일했으면 임금을 올려달라고 하거나 다른 곳을 알아봤을 텐데 난 그렇게 6개월이 넘게 법에 어긋나는 저임금에도 웃으며 일했다. 그나마 그런 나를 고용하는 사람들은 본토 영국인이 아니라 이민자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무슨 불가촉천민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영국에 있을 때,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무엇이 차별이고 무엇이 정당한 것인지 잘 몰랐다. 잘해야 돈을 때 먹히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느낌만은 옳았다. 눈치가 보인다. 그게 디폴트다. 그걸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주눅 들고 쓸쓸하다. 영국에 있을 때도 미국에 있을 때도 이상하게 화가 덜났다. 자존감이 낮아질 때의 순기능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권리는 내가 알고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이 맞지만, 설령 그 권리를 잘 모르는 것이 죄도 아니고 미안할 필요도 없다. 무지해서 당하는 사람이 병신이 아니라, 모른다고 무시하고 이용하는 사람이 나쁜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처럼 그들도 인종이 다르고 국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런던의 일당백 외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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