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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May 23. 2024

꽃길이라는 미국 박사 과정의 유혹

인생은 끊임없는 우연 속에 의지를 가진 선택으로 굽어지고 또 펴진다.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지금 생각하면 새옹지마 아닌가 싶다. 그때는 원하는 것을 이룬 것 같은데 돌아보면 실(失)이 되는 일이 있고, 크게 잃은 것 같은데 득(得)이 되는 일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저 다 지나가는 일이다.


한동안 나는 박사를 포기한 것이 들춰보고 싶지 않은 실패였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고, 교수가 된 동기들을 조금 질투했고, 한국에서의 내 위치에 우울함도 느꼈다.

지금은? 괜찮다.

차라리 안 가는 게 나았을 거라고, 3년까지 안 버텨도 되었을 거라고, 그 돈으로 판교 아파트 갭투자를 했으면 부자가 되었을 거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 상담박사 때려치기 ^^




한국에서 석사를 할 때, 조교로 있던 연구소 소장님은 정년을 5~6년 앞둔 노교수 님이셨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UCLA에서 석사를 한 뒤, 풀브라이트장학금을 받아 미국 동부의 유펜(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박사를 한 수재였다. 내가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학부 교양수업에서였다. 도시계획 교수님이 인문과학 분야의 교양과목을 개설하고  물병자리의 공모(지금은 절판된 메릴린 퍼거슨 '의식혁명'- 원제는 '물병자리의 공모)와 인간의식에 대한 책들을 교제로 쓰셨다. 4학년 때였는데 점수를 잘 준다는 친구의 정보에 주저 없이 신청했다. 나는 그때 기쁘게  A+를 받았다. 교수님은 내가 '나만의 신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며 계속 공부하기를 권하셨다. 휴학 때문에 8월에 졸업한 나는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조교로 일하다 이듬해 2월에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상담심리였다.


교수님은 지성보다 감성이 뛰어난 분이어 모시고 있는 내내 유쾌했다. 작은 연구소의 유일한 조교는 천방지축 고집쟁이이고 교수님은 그런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나는 10시에 출근해서 교수님과 찐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회의(를 가장한 티타임)를 하고 교수님이 수업에 들어가시면 혼자 공부했다. 우리는 붐비는 시간을 피해 일찌감치 점심을 먹으러 나갔고 돌아오는 길에는 남산을 산책했다. 종로에서 북엇국을 먹고 국립극장에서 남산으로, 서린낙지에서 불판을 먹고 명동에서 남산으로, 필동면옥에서 평양냉면을 먹고 동국대에서 남산으로 올라갔다. 학교에서 급식이나 청국장에 생선구이를 먹고도 굳이 택시나 버스를 타고 남산에 가서 산책을 했다. 진정한 남산 러버였다. 교수도 조교도 하루 주요 임무 중에 남산산책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연구보다는 남산이 더 기억에 남는다. 잘해야 퇴근 전에 3~4시간을 일했는데, 양보다 밀도라며 이렇게 (조금) 일해도 되냐는 나의 우려를 타파하셨다. 봄에는 학생들과 포천에서 양념갈비를 먹고 은하수를 보러 갔고(숙제에 은하수 사진 찍어오기가 있었다!) 방학에는 해외와 지방으로 원하는 공부를 하러 가셨다. 수업은 느긋했고, 학점에 후했고, 학생들에게 친절하셨다.


 '아. 교수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잘못된 롤모델을 만난 것이다.   


그 당시 남자친구는 서울대를 나온 똘똘이였다. 나는 그에게 한 번도 오목을 둬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 엑셀도 잘하고 ppt도 잘 만들고 무엇보다 수학을 진짜 잘했다. 생물학을 전공한 그가 대기업에 다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그것도 좋았다. 뭔가 신나는 일이 펼쳐질 것 같았다. 서울대에서 석사를 하고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여 당연히 같이 간다는 생각에 토플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예외 없이 붙을 거라고 믿은 석사 입학이 거절되면서 그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꺾였다. 그리고 토플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나는 홀로 유학을 갔다.


분명히 나의 선택이었지만, 교수님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실연으로 슬퍼하는 나에게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미국에만 가봐.  같이 예쁜 박사과정 한국인이 오면 공항에서부터 한국인 남자들이 차를 일렬로 세워놓고 기다릴 거야."


교수님이 팔을 길게 뻗으며 말씀하시는데 나를 위해 주차된 차들의 긴 행렬이 보이는 듯했다.

아... 속았다.


난 (주관적으로 매력덩어리지만) 객관적으로 미인은 아니다.  

하지만 공항에 한국인 박사과정 남자들이 차를 일렬로 세워놓고 기다리지 않은 것은 내 외모보다 내가 간 지역에 한국인이 1%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1%도 안 되는 한국 남자들은 결혼을 했거나 결혼할만하지 않았다. 낭만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신 유학생활은 무미건조했고, 공부는 피터졌고, 최고의 직업이라는 교수는 어느 교수도 우리 교수님처럼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꽃길이라고 했는데...


에스프레소 홀짝이며 넓은 교정을 산책하고 원하는 공부 하며 즐기다 오면 된다고,

똘똘한 한국인 박사과정 남학생들이 줄을 설 거라고,

미국에서 상담심리로 박사를 하면 한국에서 교수 자리는 어렵지 않을 거라고,

교수가 되면 존경받으면서 쓰고 싶은 글 쓰고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현직 교수님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교수만큼 좋은 직업이 어디 있겠니.  !'


나는 그 말과 진실한 표정에 현혹되었다. 교수님은 내 마음의 허세와 성공에 대한 욕망을 알고 있었던 걸까. 분명 교수님의 말씀이 한 개인의 보편적이지 않은 경험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난 그 꽃길을 믿고 싶었다. 연구보다 남산이었던 대학원 생활의 각인이 내 눈에 콩깍지를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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