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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May 30. 2024

상담심리로 유학가기 - GRE는 어려워!

내 마음의 허세와 성공에 대한 욕망

허세와 욕망 밑에 열등감이 있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14시간 이상 공부했지만 나는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 큰 언니가 하버드에서 MBA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언니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면서 열등감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오래 책상앞에 앉아 있어도 언니를 따라 갈 수 없었다. 해도해도 안된다는 좌절감은 열등감을 주었다. 박사로 유학을 가겠다는 나에게 언니가 말했다.


  "꼭 해야해? 석사는 몰라도 박사유학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너무 힘들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는 갔으면서 나는 왜 안된대!'


언니의 말에 오기가 생겨  더욱 반드시 가겠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스스로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주변의 박사과정 학생들도 많이 만나 보고  경험으로 동생에게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언니의 말을 나의 열등감이란 필터로 걸러 들었다. (언니는 박사과정을 들어가는 것을 추천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는 SOP  때도 미국에 가서도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물론, 열등감이 아니어도 나는 어릴  부터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사람이었다. 교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 단국대에서 학부를 나와 한국에서 석박사를  정교수가 있는지 상담심리 전공이 있는 대부분의 대학을 뒤져서 찾아봤었다. 지금은 다른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없었다. 우리 나라의 현실상 SKY 나오거나 북미권에서 박사를 졸업하지 않는  수도권에서 정교수가 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당시 우리 학교의 상담심리 전공 교수님은  분다 서울대 학부와 석사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를 마친 분들이셨다. 내가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을때, 전공 교수님은 내가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오면 한국에서의 학벌은 커버가 될거라고 말씀하셨었다.


열등감이 기폭제가 된 나의 성공과 명망에 대한 열망은 나를 끌어오르게했다.     


하지만 미국 유학은 거저 가는 것이 아니었다.


박사과정은 GRE에서 고득점을 맞아야 했고, 상담심리 같은 문과계열은 성적 기준이 더 높았다.

TOEFL도 기준점수를 패스하지 못하면 지원자체가 불가능했다.

영어로 SOP를 써야 했고, 관심 대학의 입시전형과 교수의 연구분야를 꿰뚫고 있어야 했다.

서류에서 붙으면 면접을 봐야 했고, 장학금도 하나하나 따로 알아봐야 했다.

학비는 더럽게 비쌌고 상담은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 장학금이 거의 없었다.


더 시간을 끌기에는 돈도 아까웠고, 시간도 부족했다. 교수가 되는 것도 좋지만,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토끼 같은 자식도 아롱다롱 낳아야 하는데 박사 시작하는데만 수년을 쓸 수는 없었다.

나는 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신감이 과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 국문과에 (잘못) 들어간 나는 대학교 4학년 , 여의도의 작가교육원에 다니며 시나리오를 썼다. 문예창작과에 갔어야 했는데  국문과에 가서 고전문학과 방언, 국문법을 배웠나 모르겠다. 나는 영어를 좋아하고 오래 공부했지만 원어민처럼 잘하진 못했다. ()남친따라 유학 가려고 대학 때부터 토플 시험을 봤지만  년간 성적은 도돌이표였다. 수능 영어는  맞았는데 토플은  점수가  나왔다. (그리고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험 영어에 대한 나의 효능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포텐이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예 가장 어려운 것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GRE 공부를 해서 점수를 받으면 TOEFL 쉽게 통과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긍정회로가 막힘없이 나를 일으켰다.


교수님은 유학에 대한 핑크빛 전망만 그려주셨을 뿐, 디테일을 채워야 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교수님은 유학을 갔다 온 지 30년이 넘었던 때라 나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실 수가 없었다. 사교육 키즈답게 강남 파고다와 압구정동의 민병철어학원에서 GRE 수업을 들었다. 이 시험이 어떤 시험이고 어떻게 공부하는지만 알면 나머지는 스스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년간 토플학원을 다녔지만 점수가 안 나왔기 때문에 학원이 점수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돈을 내고 배웠다.  


학원에 다니면서 스터디멤버를 모았다. 해커스 사이트에서 후기와 자료를 받았고, 다음카페에서 GRE 스터디 멤버를 모집했다. 연대 석사 오빠 1명, 고대 학부생 1명과 미술을 전공한 학부생 1명 그리고 나였다. 우리 넷은 GRE를 보기까지 몇 달간을 아침 7시에서 밤 11시까지 한자리에 박혀 공부했다. 내가 다니던 단국대 대학원 건물 독서실의 운영 시간이었다. 그때는 단국대가 한남동에 있어서 강북과 강남에서 오기에 중간지점이고 교통도 매우 편했다. 교내에 큰 중앙도서관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일반대학원 건물의 작은 독서실은 본교 대학원생들도 잘 모르는 곳이었다. 오랜 조교 생활로 나는 학교 곳곳의 공간을 꿰뚫고 있었다. 그 당시 교수님의 대단위 강좌의 외래강사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사 휴게실도 이용할 수 있었다. 아침 7시까지 만나 300개의 영단어를 엑셀에서 랜덤으로 돌려 출제한 단어시험을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졸리면 휴게실 컴퓨터로 라이팅 연습을 했고, 저녁 먹고 졸릴 300개의 단어시험을 한번 더 봤다. 나머지 시간에는 GRE 기출문제를 풀고 또 풀었다. 문제은행식으로 나온 문제집을 영역별로 달달 외웠다. 아직도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단어집이 있는데, 한 창 공부할 때는 몇 페이지에 무슨 단어가 있는지 까지 통으로 외웠다. 라이팅도 예상 가능 질문에 모든 답을 만들어 싹 다 외웠다. GRE 학원은 비쌌기 때문에 초반에 한 두 달 다니고, 시험 전에 그 달의 예상 기출 강의를 듣기 위해 한 달 정도 추가로 다녔다. 각자 다른 학원에 가서 모은 정보를 취합해서 돌려 봤다. 아침에는 같이 토스트를 사 먹으며 언덕을 올라왔고 점심과 저녁에는 30분씩 학교 급식을 사 먹고 공부했다. 얼마나 성실히 다녔는지 수위 아저씨들은 우리가 모두 이 학교 학생인 줄 아셨다. 연대 오빠는 같이 셔터 문도 내리고 닫는 사이가 되었고, 고대 동생은 고대 보다 단국대를 더 자주 왔다.


우리는 공부를 시작한 그 해에 모두 원하는 점수를 받았다.


이제는 점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나도 내가 그렇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것에 흡족했었다. 교수님도 내가 몇 달 만에 고득점으로 GRE를 끝낸 것에 '서울대'감이라며 추켜세워주셨다. (ㅋㅋㅋ) 시험 응시비가 비싸고 매달 있는 시험이 아니어 한 번에 결판을 내고 싶었다. 그래도 플랜 B에 2번까지는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한 번 만에 점수가 나왔다. 혼자 했다면 아마 중간에 포기했을 일인데, 넷이어서 가능했다. 졸리면 깨워주고, 어려운 것은 알려주고, 모의고사도 함께 봤다. 사람은 그래서 참 중요하다. 매일 만나서 오직 하나의 목표로 정해진 길을 달려가는 일이 나에게는 잘 맞았던 것 같다. 한 번 시동이 걸리자 공부가 너무 잘됐다. 심지어 재밌었다.


그 당시 나의 오랜 친구인 불안은 성취를 높이는 원동력이었다. '늦으면 늙는다'는 불안이 나에게 부스터를 달아주었다.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삶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장기적으로 기대해 볼 수 있는 성공에 대한 욕망은 나의 집중력을 끌어올렸고 외로움과 친밀감에 대한 욕구가 많이 새어 나오지 않게 눌러주었다. 하지만, 외로움이 높았다면 금방 우울이 높아져서 아무리 불안이 부스터를 달아도 달리지 못하는데, 동료가 있다는 것이 나를 덜 외롭게 해 줬다.


불안 6 우울 0 외로움 3 성취감 8


성취감은 학력에 대한 나의 열등감을 조금씩 허물었다.

그렇게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


GRE 성적표도 다 버렸는데 끝까지 버리지 못한 235 페이지 분량의 한국 GRE 5.5 단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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